침금동인으로 복원한 내의원 표준경혈 10

기사입력 2024.05.16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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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세기 조선의 침구 경혈은 어떤 모습일까?
    동인도銅人圖와 침금동인의 복삼(BL61)

    박영환 원장(시중한의원).jpg

    박영환 시중한의원장(서울시 종로구)

     

    침금동인의 복삼(BL61)은 발꿈치 뒤쪽 가운데 아래에 위치한 경혈이며 실제 자침한 기록이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유일한 경혈이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1747년, 민간에서 가장 침술이 뛰어나다고 하는 두매(斗梅)와 송월(松月)의 실력을 시험하기 위해 영조임금 앞에서 두 사람이 침금동인의 복삼(BL61)에 자침을 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이처럼 침금동인의 복삼(BL61)은 역사의 고증을 확실히 받은 경혈이다.

     

    그런데 <WHO/WPRO 표준경혈위치>에서는 복삼(BL61)을 “발 가쪽면, 곤륜(BL60)의 먼쪽, 발꿈치뼈 가쪽, 적백육제”라고 정의하고 있어 발꿈치의 옆에다 표시하고 있으며 침금동인의 복삼(BL61)과는 전혀 다른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동인도의 작도作圖 원리를 고려하지 않은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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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록에 따르면 현재 전해오는 동인도 중에서 가장 초기에 그린 명당도(明堂圖)는 북송(北宋)의 석장용(石藏用)이 그린 동인도라고 한다. 이 그림은 현재 남아있지 않고 이를 이어받은 동인도가 1474년 명(明) 사소(史素)의 성화사소중수동인도(成化史素重修銅人圖)라고 한다. 

     

    또 1303년에 제작하였다고 하는 원대(元代) 삼인명당도(三人明堂圖)는 후세에 수많은 의가들이 모사(模寫)하였으며 <의학강목>, <침방육집>, <침구대성> 등에 수록되어 있고 청대(淸代)에 여러 번 중간(重刊)하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의 동인도는 현재와 같은 원근법을 사용하여 보이는 그대로 그린 것이 아니라 조선후기의 책가도(冊架圖)와 같이 다중 시점(視點)으로 경혈을 기록한 일종의 전개도라고 할 수 있다. 즉 인물화처럼 사실 그대로를 그리기보다는 2차원 평면에 3차원의 경맥 경혈을 모두 표시하기 위해 피카소의 그림처럼 동시에 상하좌우의 경맥과 경혈을 평면에 모두 그려 넣은 것이다. 

     

    앞모습을 그린 정인도(正人圖)와 뒷모습을 그린 복인도(伏人圖) 2장으로 구성된 동인도의 경우에는 측면의 경맥과 경혈을 정인도의 아랫배 쪽에 빈 공간을 활용하여 빠짐없이 기록했다.   이와 같은 이유로 본래 발꿈치 뒤에 있지만 동인도에서 정확한 위치를 표현 할 수 없었던 복삼(BL61)은 관습적으로 발꿈치 옆에 기록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을 인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삼(BL61)이 실제로 발꿈치의 옆에 있는 것으로 잘못 알게 된 것이다.

     

    이상으로 내의원에서 제작한 침금동인과 <WHO/WPRO 표준경혈위치>의 경혈 중에서 몇 개를 10회에 걸쳐 간략히 비교하고 그 차이점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경혈 위치는 18세기 내의원의 표준 경혈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영조의 윤허를 받아 침금동인의 제작을 총괄하고 여러 침의(鍼醫)들과 함께 경혈을 최종 검수한 분은 내의원 수침의(首鍼醫) 오지철(吳志哲)이다. 또한 조선시대 최고 명장(名匠)인 최천약(崔天若)이 없었다면 침금동인의 주조(鑄造)는 불가능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침금동인을 통해 내의원에서 학습하던 경혈의 정확한 위치를 약 280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직접 배울 수 있게 됐으며 내의원 침구 의학을 원형 그대로 전승받을 수 있는 길을 찾게 됐다. 

     

    지금까지 우리가 출처를 모르고 사용했던 왜식 경혈은 내일이라도 과감히 폐기하고 침금동인에 근거하여 의사학적 고증을 바탕으로 우리나라의 침구의학의 표준을 재정립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할 것이다. 앞으로 중국, 일본과 차별화 된 수준 높은 ‘K-침구의학’을 전 세계에 알리는 때가 빨리 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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