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병원 생활에서 만든 좋은 추억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기를 바라”
김은혜 치휴한방병원 진료원장
<선생님, 이제 그만 저 좀 포기해 주세요> 저자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한의사로서의 직분 수행과 더불어 한의약의 선한 영향력을 넓히고자 꾸준히 저술 활동을 하고 있는 김은혜 원장의 글을 소개한다.
오랜 기간 입원해 계시는 환자분들과 자연스레 가깝게 지내다 보면 별의별 말들을 들을 때도 많고, 별의별 일들을 겪을 때도 많았다. 그중에서 가장 크게 회자되었던 한 남녀의 이야기를 전한다.
한 여자가 입원하러 왔다. 아주 왜소한 체격에 낯빛에서 우울한 기색이 여실히 보이는 40대 환자였다. 난소암으로 자궁 전체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고 잔존 암 없이 4년 차에 들어선 환자였다.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는 우울함과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한 여러 사건 때문이었다. 아기를 좋아하는데 결혼 상대가 없어 난자 냉동까지 해놓았지만 자궁 전체를 다 들어낸 게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고 말하는 환자는 말을 덧붙였다.
“이전에 다른 병원에 입원했는데 제가 힘들다고 말하니 다른 암 환자분들이 ‘그래도 자기는 곧 완치이니 상황이 나은 거’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물론 맞는 말이고 제가 그분들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으면 안 되었긴 한데……. 그렇지만 저한테 완치까지 남은 2년은 긴 시간이고, 사회에 복귀하기에는 저에게 암 투병 중이라는 말이 따라오고, 체력도 안 받쳐주거든요. 위로를 받고 싶은데 마땅한 사람은 없고……. 자꾸 마음을 곱씹다 보면 원래 긍정적이었던 내가 왜 이렇게 되었나 싶으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런 생각이 끊이지 않아서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까 제가 우울증인 것 같던데 그렇다고 정신과 약을 먹기는 싫고…….”
한 남자가 입원하러 왔다
완치를 앞둔 암 환자들이 생각보다 많이 겪는 딜레마였다. 혹자는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는 것 자체를 부러워하기도 했지만 본인들에게는 너무나도 무겁고 남들에게는 선뜻 내비치기 힘든 감정이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의사에게도 말하기도 눈치 보인다는 모습으로 말을 이어 나가는 환자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며, 간호사 선생님에게 지금 배정되어 있는 병실 호수를 바꿔 달라 요청했다.
원래 같은 질환을 가진 분들끼리 한 병실을 쓰도록 되어 있어서 암 환자 병실에 배정되어 있었는데, 이전 병원에서의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환자를 위해 활발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원내를 돌아다니는 분들이 있던 병실로 바꿔 달라한 것이다.
처음에는 그 분위기를 다소 부담스러워하는 기색을 보이던 여자는 이내 어머님들의 친화력에 동화되어 곧잘 같이 다녔고 처음의 우울한 모습이 잠깐이나마 사라지는 순간이 점점 많아지는 나날들이 흘러갔다.
한 남자가 입원하러 왔다. 아주 건장한 체격에 낯빛에서 호탕한 기색이 여실히 보이는 40대 환자였다. 폐암으로 절제술, 항암 치료, 방사선 치료를 모두 받고 잔존 암 없이 3개월 뒤면 완치 판정을 받는다.
여기에 온 이유는 한 달 뒤에 다시 회사에 다닐 예정인데 그 회사에서 ‘세 달 뒤면 완치이며 현재 일상 복귀가 가능한 신체 상태’라는 것을 병원에서 증명해 오라고 했기 때문이다. 전처를 20대 시절 일찍 떠나보내고 본인도 지난 5년간 투병을 해봤지만 암 환자로 사회를 살아가는 것이 참 녹록하지 않다고 말하는 환자는 말을 덧붙였다.
“저 같아도 회사 오너면 당연히 확인할 절차이겠지만 막상 또 제 이야기가 되니 씁쓸합니다. 저는 그래도 경력이라도 있으니 이렇게 해주지, 아닌 사람들은 더 고생이겠지요? 남들 앞에서는 이런 고민 털어놓지도 못하는데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병원이 편하긴 하지만……. 이제 병원은 빨리 졸업하고 싶습니다!!”
보이는 것보다도 더 호탕한 성격이었다. 한편으로는 그 성격이, 아내와 본인의 투병 생활을 겪으면서 이겨내 온 고난들의 산물인 것 같아 괜히 마음이 뭉클해지기도 했다. 당시 남자 병실에 비어 있는 자리가 많이 없던 터라 간호사 선생님이 “이 환자는 암 병실 아닌 곳으로 배정해도 되겠냐”는 요청에 흔쾌히 허락을 했다.
배정된 병실의 아버님들이 운동에 진심이었기에 식후마다 산책을 다 같이 나갔는데 마침 취향이 맞았는지 남자는 그 분위기에 곧잘 어울렸다.
매번 어디 다녀오시는 거예요?
몇 주가 흘렀다. 입원 병동을 하루에 두세 번 병실 순서대로 쭉 돌며 환자를 보는데, 묘하게 두 사람이 같이 없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각자의 병실이 통째로 비어 있는 날도 많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어느 날 오후, 두 사람의 얼굴을 못 본 지 며칠이나 되었다는 생각에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복도에서 기다렸다. 몇 분 뒤, 병동 문이 열리고 여자가 먼저 들어오고 그 뒤를 따라 남자가 들어왔다. 나와 눈이 마주치고 흠칫 놀란 여자는 달려오면서 아는 척을 했다. 눈짓으로 인사를 하고 같이 병실로 들어가면서 “매번 어디 다녀오시는 거예요?” 하고 물었다. 그 말이 병실 전체에 울리자 병실 안에 계시던 어머님들이 갑자기 일괄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느끼기에는 아주 생소하게 다가오는 분위기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여자를 쳐다보자 여자는 얼굴을 붉힐 뿐이었다. “뭐가 있으신가 보네. 좋은 일인 것 같으니 이야기해줄 준비되실 때 말씀주세요”라고 말하고 병실 밖으로 나섰다.
이어서 남자를 찾아갔다. 평소와 같은 얼굴로 신발 정리를 하던 남자는 나를 보고 “여, 선생님 오셨어요!” 하고 반겼다. 나는 여자에게와 같은 질문을 건넸다. “매번 어디 다녀오시는 거예요?” 남자의 답변은 황당했다. “담배나 한 대 피우고 오는 거죠, 뭐.”
“예? 완치를 앞둔 폐암 환자가 담배를요? 담배 끊으신 지 오래되셨다면서요!” “아, 그 담배가 아니고……. 그러게요. 저 담배 끊었는데, 허허.” “예? 무슨 말씀하시는 거예요, 지금? 가지고 계신 담배 주세요. 담배는 안 됩니다.” “담배 없어요. 그런데 선생님, 맞은편에 OOO 환자 상태 어때요?”
“다른 환자분 이야기는 말씀 못 드려요. 궁금하시면 직접 친해지셔서 말씀 나누세요. 말 돌리지 마시고 담배 주세요.” “아니 본인이 말을 안 해주니까……. 아! 담배는 없다니깐요~?” 옷 냄새만 맡아봤어도 그가 담배를 피우고 온 것이 아니었음을 알았을 텐데, 과거의 나는 참 눈치가 없었다.
모르는 척해!
퇴원을 며칠 앞두고 두 사람은 퇴원 날짜를 같은 일로 맞췄다. 그때까지도 눈치를 못 채고 있던 나는, 환자와 같은 병실을 쓰던 어머님이 “모르는 척해”하며 알려 준 귀띔 덕에 자초지정을 알게 됐다.
아마도 두 병실의 어머님들과 아버님들의 돌아다니는 동선이 겹치면서 자연스럽게 인연이 된 것 같다. 돌이켜 보면 두 사람은 나와의 첫 대화에서부터 서로 간의 상처를 보듬어 줄 수 있는 성격을 보였던 건지도 모르겠다.
퇴원하는 당일, 두 사람의 짐이 담긴 캐리어 2개를 지키고 있는 남자를 뒤로한 채 여자가 나에게 다가왔다. “선생님, 저희 만나보기로 했어요.”
수줍게 고백하는 여자의 손을 잡고 방방 뛰었던 기억이 난다. 그 뒤로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짧은 병원 생활에서 만든 좋은 추억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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