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일 원장(한의사·한국국제협력단/우즈베키스탄 글로벌협력의사)
10월 26일부터 29일까지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에서는 ‘아부 알리 이븐시나와 문명’이라는 주제로 ‘제12회 국제 아비센나 과학 컨퍼런스’가 열렸다.
아비센나는 아부 알리 이븐시나의 라틴어 이름으로 유럽을 비롯한 일반 서구 학술계에서는 이 이름이 흔히 사용된다. 이는 아마도 그가 아랍어로 저술한 ‘The Canon of Medicine(한국에서는 의학정전 혹은 의학전범으로 번역됨)’이 1180년에 라틴어로 번역돼 유럽 의학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되면서 그의 이름이 아비센나로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정확한 이름은 ‘아부 알리 알 후사인 이븐 압둘라 이븐 시나’로 우즈베키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에서는 이 긴 이름을 축약해 이븐시나로 불리우고 있다.
이븐시나, 의학 등 모든 학문 분야에서 영향력
980년에 출생해 1037년 사망한 이븐시나의 영향력은 1000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도 단지 의학 분야에서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철학·자연과학·기하학·논리학·법학 등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의 방대한 저작(아랍어 저작 456권, 페르시아어 저작 23권)은 오늘도 전세계 많은 학자들의 연구 속에서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다.
이번 ‘제12회 국제 아비센나 과학 컨퍼런스’는 △아부 알리 이븐 시나-건강의 철학 △우즈베키스탄-튀르키에 과학 포럼 △우즈베키스탄-이란 과학 원탁 회의 등 크게 3개의 섹션으로 26일부터 28일까지 진행됐다.
26일 오후에 발표자와 행사 참가자들이 모두 이븐 시나의 고향인 아프소나를 찾아가 그의 박물관을 관람하는 것으로 행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븐 시나 박물관에서는 올해 이븐시나 학술대회에 참석한 미국 조지타운대학교의 하키마 암리 교수가 자신의 저서인 Avicenna’s Medicine을 박물관에 기증하는 기념식이 크게 진행됐다.
성대한 기증식을 바라보면서 한가지 아쉬웠던 점은 국내에는 이븐시나의 저작이 한국어로 번역된 것이 한 권도 없다는 것이었다. 이웃 일본과 중국에는 이미 ‘의학정전’이 번역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필자는 동의보감을 러시아어와 우즈벡어로 번역해 세상에 알리는 꿈을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었는데, 더불어 이븐시나의 의학정전을 한국어로 번역해보고 싶은 꿈도 생겼다.
국가 단위별 컨퍼런스 운영 ‘눈길’
27일에 이뤄진 전통의학 분야 발표는 △아부 알리 이븐 시나-건강의 철학 섹션에서 이뤄졌다. 한국, 중국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국가와 러시아와 튀르키예에서 발표자가 참가해 각국의 전통의학 발전현황을 공유하고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서도 토의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국측 발표로는 필자의 △새로운 실크로드: 파킨슨병 치료의 유망한 ‘방법’으로서 Avicenna 실크의 잠재력에 대한 연구, 대구한의대 송지청 교수의 △인공지능을 활용한 동의보감(한의학 고전 교과서)의 새로운 접근 방식, 마디로한의원 손영훈 원장의 △새로운 침치료 방법: 도침, 리우한의원 강은영 원장의 △당뇨병의 한의학적 치료가 있었고 여러 국가의 참가자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다.
개인적으로 여러 발표 중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우즈베키스탄 카로모토프 의사의 ‘왜 약초가 치료하는가?’란 발표였다. 우즈베키스탄에서 근무하며 여러 학술대회를 다녀봤지만 이런 수준 높은 발표를 접하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특히 식물의 단순한 유효성분 분석이나 실험에 대한 이야기를 넘어 앞으로 우즈베키스탄 자생 약제들의 연구방향을 논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올해 행사 운영 전반에 있어 흥미로운 점은 이번 컨퍼런스가 주제별로 분획되었다기보다는 국가 단위로 나뉘어진 것이다. 컨퍼런스 해외 참가자의 대다수가 튀르키예와 이란 학자들이 차지할 만큼 양 국가에서 많은 관심을 보였다. 튀르키예의 경우는 TIKA(Turkish Cooperation and Coordination Agency, 튀르키예 정부 문화관광부 산하기관으로 개발협력을 주관한다. 필자가 근무하고 있는 KOICA(한국국제협력단)와 비슷한 성격이라고 볼 수 있다)에서 직접 나서서 과학 포럼을 주관했다. 이란은 역사적으로 이븐시나가 페르시아 사람이었으며 현재의 이란 영토인 하마단에서 이븐시나가 사망했기에 이란 정부 차원의 지원으로 회의가 진행됐다. 이는 이번 국제 컨퍼런스가 단순히 학문적 교류의 차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 뒷 배경에는 이슬람 문명세계의 현존하는 정치 사회적인 협력과 발전을 도모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중세시대 유럽을 앞질렀던 찬란한 이슬람문명이 가진 위대함을 전세계 이슬람 국가에서 서로 굳건히 교류하고 장려해 현대의학 발전의 시작이 누구인지 똑똑히 보라는 메시지를 현재 의학계의 주류인 유럽, 미국의 기독교 문명국가에 전달하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28일 오전에는 전통의학 분야의 마스터 클래스가 진행됐다. 한국측에서는 대한한의약해외의료봉사단(KOMSTA) 명예단장이신 강동철 원장님의 △초음파 유도를 통한 도침과 약침의 통증 치료 강의가 진행됐다. 마스터 클래스 강의를 통해 우즈베키스탄 전통의학과 학생들은 초음파를 활용해 해부학적 구조를 파악하고 정확한 목표점에 도침과 약침을 자입해 치료하는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게 되어 많은 감명을 받았으며 이 분야를 계속 연구해보고 싶다는 반응이 많았다. 이 분야는 침구의학이 아직 걸음마 단계인 우즈베키스탄에서는 매우 생소한 분야로 앞으로 많은 관심과 주목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 제12회 국제 아비센나 과학 컨퍼런스에 참가하면서 흥미로운 현상을 발견했다. 이븐시나의 여러 업적 중 그의 자연철학적인 관점을 통한 신체의 구조, 질병의 원인과 증상, 치료법 등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이 현대의학 발전의 훌륭한 자양분이 됐다는 것이 대부분 학자들의 평가다. 이런 점이 서양에서 그를 히포크라테스와 더불어 의학의 성인으로 손꼽는데 주저하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의학의 성인으로 불리었던 그가 이번 컨퍼런스에서는 전통의학의 성인으로도 불리우는 것이었다.
러시아를 비롯한 중앙아시아에서 전통의학은 서구 유럽의 의학을 뜻한다. 러시아어로 Традиционная медицина는 바로 Western medicine이다. 우즈베크어로도 마찬가지다. 직역하면 전통의학을 의미하는 An’anaviy tibbiyot은 western medicine을 일컫는 것이다.
따라서 유럽, 미국, 한국, 중국, 일본에서 이야기하는 Traditional medicine을 논하고자 하면 부정어(영어의 no와 같은)인 не와 no를 붙여서 нетрадиционная медицина, noan’anaviy tibbiyot라고 해야 한다. 하지만 세계연구의 흐름상 traditional medicine은 western medicine, 현대의학과는 구별되는 전통의학이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리고 지금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이 용어가 무분별하게 혼용이 되다 보니 혼란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발표자가 ‘전통의학’이라는 용어를 정확히 사용하지 않아 청중들이 재차 확인하고 바로 잡는 경우를 여러 번 보았다.
서양의학·전통의학 성인으로 불리우는 이븐시나
이런 재미있는 현상을 보면서, 이는 단순히 의학용어의 혼선으로 인한 헤프닝으로 웃어넘길 일은 아니라고 느꼈다. 그보다 서양의학 발전의 주춧돌 역할을 한 사람이 알고 보니 전통의학 발전의 주춧돌이기도 한 이 공존과 통합의 의학사적 사실을 사람들이 차츰 깨달아가는 과정이 시작됐다고 짐작되었다. 조금 과장하자면, 의학의 동·서·이슬람 등의 구별이 무의미하며, 그 모두를 아우르는 전체로서의 인류를 위한 의학을 추구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암시하는 징조라고 생각한다.
2년 후, 보다 많은 한국 한의사들이 본 행사에 참가하여 대한민국이 전통의학 발전 형태의 모범이 되는 나라임을 보여주시기를 기대한다. 또한 취약한 의료상황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우즈베키스탄 여러 지역에서 한국 한의학이 환자를 치료해주고, 환자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으며 더불어 각 지역 의과대학에서 한의학 강의가 보다 많이 진행됐으면 좋겠다. 한국 한의학이 우즈베키스탄에서 굳건한 위치를 유지할 수 있도록 여러 기관과 단체가 많은 지원과 노력을 해줬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