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숙 여의도 책방-45

기사입력 2023.10.26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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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치한약수에서 한 글자 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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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미숙

    국회사무처 부속한의원 원장

    (前 부산대 한의학전문대학원 교수)


     

    초선으로 내년 아니 몇 년 후가 더 기대되는 의원님 한 분이 묻는다. “원장님은 정치의 목적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싸우는지 자주 회의가 들어요. 그래서 요즘 혼자 있는 거의 모든 시간에 목적이라는 단어를 떠올려 봅니다.” “의원님! ‘목적’이라는 단어에 ‘본질’을 추가시켜 보세요. 요즘 정치가 실종인 이유는 모두가 비겁하기 때문 아닌가요? 정말 중요한 담론은 저 땅속 깊이 묻어두고 있쟎아요. 여야 모두 해결하기 어려운 것들이니까요. 대신 천박하고 얕은 상대방의 단점들을 말투까지 트집 잡으며 서로 싸우고, 그걸 또 언론은 방구석 1열에서 구경하며 분초를 쪼개서 보도만 해요. 지금 싸우고 있는 주제가 과연 진지한 것들일까요?” “기득권 가진 정치인들이 그 권한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말을 너무 많이 들어요. 총회 참석해서 같은 공간에서 이렇게 둘러보면 저도 그렇지만 다들 기득권은 맞아요. 가까이 붙어 앉아 있으면서 면전에 대고 무슨 말을 하겠어요.” “의원님이 해 보세요. ‘나도 비겁했구나..’ 나중에 후회하지 마시고, 직접 용기 있게 말을 해 주세요. 이제 당신들의 시대는 끝이 났다고!!” “당신들의 시대는 끝이 났다? 휴우....” 

     

    이런 의미 있는 대화가 오가는 날은 많지 않다. 나도 바쁘고 그들은 더 바쁘다. 가끔 느닷없이 여유 있는 20∼30분이 주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이런 대화가 가능한 특정인이 내원해야만 경험할 수 있는 아주 짧은 순간이다. 그 날, 본질과 목적이라는 단순한 두 개의 단어가 마음에 남았다. 정치의 본질과 목적 그리고 의료의 본질과 목적. 일개 한의사인 내가 ‘의료’라는 단어를 말할 때 “너 뭐 돼?” 자문하게 된다. ‘이토록 협소한 영역에서 이토록 협소한 질환만 봐온 주제에 ‘의료의 본질과 목적’이라는 주제에 한 줄 논평이라도 얹을 자격이 감히 너에게 있는 거야?’


    의료의 본질과 목적은 무엇일까? 

     

    ‘필수의료 강화’라는 글귀를 볼 때마다 ‘비필수의료는 약화되다가 사라지겠지, 그게 한의학일지도 몰라’라는 부정적인 생각도 가끔 든다.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많은 선후배들이 떠오른다. 피 말리는 생존경쟁과 의료 자영업자로서의 고충을 참아가며 자존심과 자부심을 부여잡고 야간진료에 주말진료에 그렇게들 버티고 있는 나의 귀한 동지들 말이다. 이렇게 힘든 진료가 일상이 된 대부분의 한의사들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한의학을 잘 팔아먹는 분들도 있다. 대개 본인의 난치병을 한의학으로 극복한 드라마틱한 서사를 가지고 있으며 새로 얻은 제2의 인생을 오직 국민건강 증진에 바치겠다는 신념에 사로잡힌 한의학 전도사라 자칭하는 비의료인 출신의 유튜버들이 바로 그들이다. 

    채널명 『허준할매 건강TV』의 운영자가 국내 한의사면허를 취득한 적 없고 국내에서 의료행위를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한의협이 공식적으로 발표하며 국민 여러분께서는 착오 없으시기를 바란다고 당부까지 했던 때는 작년 12월22일이었다. 유튜브 구독자들은 그녀가 한의사면허가 있거나 없거나 그건 중요한 사실이 아닌 모양이다. 끝도 없는 다양한 장르에서 해당 분야 레벨이 최고점(?)에 도달한 능력자들이 군웅할거식으로 구독자를 확보해가는 유튜브 전쟁통에서 그녀는 이미 62만명이 넘는 구독자를 확보했다. 한 달 전에도, 열흘 전에도, 이틀 전에도 꾸준히 영상을 올렸다. “두드리기만 해도 거시기 벌떡” “전립선 건강이 곧 정력이다” “소변찔끔 사정찔끔 거릴 때 여기 누루면(‘누르면’의 잘못된 표기로 추정됨) 직방!” “화 잘 내는 배우자, 애인 이걸 먹이면 빵끗” “지방간, 간독소에 이게 그렇게 좋다는데…” 등의 제목을 보면 이 채널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걸 60만명 넘는 사람들이 본다고?’라는 어이없음(!)에 코웃음을 칠 지도 모르겠지만 댓글의 대부분은 “우리 박사님 최고시다” “우리 할머니 한의사님 인상 너무 좋으시다”이다. 어디 그 뿐인가? 온라인 쇼핑몰(https://heojungranma.co.kr)에서는 침향단을 55%까지 할인하고 있으니 어서 와서 사가라는 광고문구가 영롱하게 번쩍거린다.

     

    궁금해서 이 분이 직접 썼다고 알려진 저서의 작가소개란을 읽어봤다. 결혼 후 조금 늦은 나이에 한의대에 진학해 한의학박사가 됐고 의사가 포기할 만큼의 위중한 상태에서 유서까지 써놓고 고군분투하던 저자는 한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진정한 의술이 무엇인지 깊이 고민하게 됐다고 한다. 개인 병원에서 환자를 진료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방바이오 생명과학연구소에서 한약재를 과학화하는 일에 힘쓰면서 세계 최초로 무통채혈침을 개발했고 이 침은 코로나19 항체진단키트에서 채혈용으로 사용됐고도 밝히고 있다. 한의학박사 학위–한약재의 과학화–무통채혈침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암튼 그렇다고 한다. 이 바쁜 와중에도 의학의 대중화(?)를 위해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고 의료인으로서의 소명의식을 다해가며 현재 의료계 일선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이라는 문장으로 대단하신 분의 소개는 끝을 맺는다. 

     

    200여가지의 건기식을 개발했다는 “한방바이오 생명과학연구소”나 100년만에 세계 최초로 개발에 성공했다는 무통채혈침 관련해서는 이 분이 실린 인터뷰 기사([파워인터뷰] 최00 박사 “동의보감이 살린 내 삶 ... 이젠, 국민 건강 위해 삽니다”, 비즈니스 리포트, 정우헌 기자, 2022년 2월) 이외에는 그 어떤 공신력 있어보이는 매체의 기사들이 검색되지 않았다. 국민할매를 꿈꾸시는 허준할매에 대한 정보는 딱 여기까지다. 한의협이 뭐라고 하든 그녀는 유튜브에서만큼은 한의학박사이며 국민건강을 위해 노력하는 자칭 의료인이다. 출판 비즈니스의 어두운 단면이겠지만 이런 책에 추천사를 써준 인사들 중에는 한의사도 한 명 포함돼 있다. 


    한의사 사칭 무면허자들의 유튜브 콘텐츠 양산 ‘눈살’ 

     

    한의사를 사칭하는 자들이 어디 한둘이었나?! 그리고 이는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다. 봉침 놓는 목사님, 추나치료로 키를 키워준다는 태권도 관장님, 왕뜸 하나는 본인이 으뜸이라는 동네 뜸방 아저씨까지는 봤는데 학위에 면허까지 사칭해 자칭 의료인으로서 국민건강 사수에 의무감을 가지고 있다는 유튜버들은 새로운 차원이라 신선하기까지 하다. 이 할매 말고 또 다른 대구의 한 할배는 그냥 한의사도 아니고 한의대 수석졸업에 한의사 국시 수석에 한의학박사도 부족해서 의학박사에 청와대 의무실에서까지 진료를 했었다는 개뻥구라 허언증의 대마왕으로 불러도 부족할 판이다. 중간에 몇 번 발각이 되었던 것 같은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음에도 최근까지도 환자를 보고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이 분도 유투브 채널을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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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입을 준비하는 수험생들과 학부모들에게 메디컬로 일컬어지는 의치한약수에서 ‘한’ 글자는 빼도 될 것 같다. 이걸 먹어봐라, 저걸 발라봐라, 여기를 두들겨라, 저기는 문질러라, 이게 한의학인가? 대중들이 바라는 그리고 바라보는 한의학의 본질과 목적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자칭 의료인에 한의학박사라고 광고하는 저런 자들에게 어떤 법적 조치도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한의대의 폐지를 허하라!!” “한의대 입학 정원을 의대 입학 정원으로 돌려라” “한의사 업권을 보장하라”를 외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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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한 중견배우의 마약 관련 뉴스를 듣고 실망감과 놀라움을 감출 길이 없었다. 공허함이었을까? 성공에의 도취였을까? 더 이상 느낄 쾌락이 없어서였을까? 미쳐돌아가는 듯한 작금의 시대 속에서 정신적 건강을 유지한다는 것은 정신을 차리고 산다는 것은 또 다른 경지이기는 하다. 

    국내 우울증 환자에 대한 최근 기사(우울증 환자 100만명 시대, 정신건강 경보 울렸다, 경향신문, 2023년 10월4일 사설)와 자주 인용되는 국내 자살률에 대한 통계(2020년 인구 10만명당 24.1명으로 OECD 평균 자살률 11.1명의 2배를 넘는 수치이며, 2003년 이후 자살률 부분에서 2016, 2017년 2개 연도를 빼고는 OECD 국가들 중 1위를 지키고 있다)기사만 떠올려 보더라도 ‘나는, 내 가족은, 내 가까운 사람들은 다들 안녕한건가?’ 묻게 된다. 그리고, 돌아보게 된다. 

     

    많은 유명인들이 공황장애나 우울증, 불면증을 겪었었는데 약 복용이 가장 좋았었다는 자기고백을 공개석상에서 자주 하곤 한다. ‘혼자 고민하지 말고 바로 정신과를 방문해야 해’라는 게 암묵적인 법칙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추세이다. 물론 한방신경정신과를 전공한 한의사전문의를 만나는 방법도 있겠지만 한의사에게 가서 이러저러한 정신과적 질환이 나았다는 에피소드가 대중적으로 언론에 보도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오히려 “한방신경정신과도 있어?”라고 반문하는 자들을 많이 접하게 될 것이다.


    미국의 정신질환 실태 및 의료적 실패 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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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버트 휘태커의 『약이 병이 되는 시대』(건강 미디어 협동조합, 2023년 9월25일)라는 신간은 미국의 정신질환의 실태와 의료적 실패를 고발하고 있는 책이다. 추천사를 쓴 노년내과전문의 정희원 선생은 “제약회사는 성인 과잉행동 집중력 장애처럼 비교적 새롭게 부각되는 문제들을 빠르게 의료화(medicalize)하고, 더 많은 이들이 장기간 처방을 복용하도록 만들고 있다”라며 제약회사의 약물 함정(drug trap)을 통한 고객 유치와 고객 유지 전략을 비판했다. 이어서 추천사를 쓴 정신과전문의 조철래 선생은 “기계론에 입각한 서구의학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이에 힘을 얻어 최근 20∼30년 사이 정신의학계가 취한 생의학화(biomedicalization)는 이제 그 한계에 다다른 것 같다”고 말했다.


    - 2012년 피터 타일러(Peter Tyler)는 ‘정신약물학 혁명의 종말’이라는 사설을 통해 정신의학계가 항정신병약물 사용에 대해 재검토해야 할 때가 왔다고 말했으며, 2013년 패트릭 맥고리(Patrick McGorry)는 ‘적은 것이 더 낫다’는 사설에서 이제는 정신의학계가 방법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내용은 심층적인 심리사회적 개입만으로 초발 정신증에서 회복 가능한 극소수의 환자를 파악하고 어떤 약물을, 얼마나 오랫동안, 어느 정도의 최소 용량으로 사용할 지를 결정하여 이들이 회복하고, 건강을 유지하며, 만족스럽고 생산적인 삶을 누리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 20년 전, 미국 사회는 어린이 및 청소년에게 정기적으로 정신과 약물을 처방하기 시작했고, 이제 미국인 15명 중 1명은 ‘심각한 정신 질환’을 앓은 채 성인이 된다. 이는 약물 기반 치료 패러다임이 득보다 실이 훨씬 많다는 가장 비극적인 증거이다. 어린이와 청소년에 대한 약물치료가 보편화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미 수백만 명이 평생 정신질환의 길로 들어섰다


    - 과거에는 중증 환자에게만 유용하고 매우 문제가 많다고 여겨진 항정신병약물이 2008년에는 콜레스테롤 강하제를 제치고 가장 많은 매출을 올린 약물이 되었다. 오늘날 미국인 8명 중 1명은 정기적으로 정신과 약물을 복용한다. 화학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해 약을 무기한 복용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당신의 우울증은 뇌의 신경전달물질이 문제입니다. 여기, 졸로푸트를 복용해 보세요. 약이 듣지 않으면 푸로작을 드세요. 그래도 안 들으면 이펙사를 드세요. 그 이후 잠이 힘들면 수면유도제를 추가로 드시면 됩니다”).


    - WHO는 우울증 검진의 가치를 평가하기 위해 전 세계 15개 도시에서 시행한 연구에서 우울증 진단이 되었든 안 되었든 정신과 약에 노출되지 않은 군이 가장 좋은 결과를 보였다고 보고했다. 1년 관찰의 끝 무렵 훨씬 더 나은 전반적 건강 상태를 누렸다. 지속되는 우울증으로 가장 큰 고통을 받은 집단은 항우울제로 치료받은 환자들이었다. 


    - 제약회사들은 새로운 약물을 출시하면서 미국 최고의 정신과 의사들을 고용하여 이 새로운 신비의 약물이 뇌 화학의 균형을 어떻게 맞추는지를 설명했다. 정신의학의 약물 치료의 온당함을 우리 사회에 팔기 위해 정신의학은 신약의 가치를 지나치게 과장하고 비판을 침묵시키며 좋지 않은 예후에 대한 이야기를 숨겨야 했다.


    인터뷰에 응했던 만성 우울증 환자 한 명은 “정신과 약물을 사용하면 일정 기간 동안 한 가지 문제를 해결 가능하지만 그 다음에는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정신과 치료는 위기의 시기를 만성 정신질환으로 만든다”라고 말했다. 

    정신과 전문의인 장창현 선생은 역자후기에서 “DSM에 정의된 정신 질환들의 어느 하나도 속시원하게 생물학적인 원인은 밝히지 못했다. 우리는 항정신병 약물이 망상과 환청을, 항우울제가 우울한 마음을, 항불안제가 불안을 완전히 없애줄 것처럼 생각하고 약을 복용한다. 하지만 그것들이 실현 가능한 과제일까? 마음의 증상을 박멸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할까? 오히려 그렇게 살다가 삶의 활력을 잃게 되고 생각지 못한 또 다른 어려움을 겪는 건 아닐까? 좋은 치료는 결국 환자 삶의 맥락 안에서 실효성 있는 도움이 어떤 것인지 살피고 제공하여 그들의 활력을 되찾게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바로 좋은 과학이다”라고 말했다.


    좋은 한의학을 실천할 수 있는 좋은 한의사 되자!  

    다시 본질과 목적으로 돌아가자. 한의학의 본질과 목적은 무엇일까? 일시적으로 겪는 정신적 위기에 특별한 진단명을 내리고 지속적 약물 복용을 통해 다시는 약 없는 생활이 불가능한 만성질환자로 만드는 약물 기반의 치료 패러다임을 책에서는 해가 되는 진료(poor practice)라고 표현했다. 환자들의 다양한 증상과 질환에 안전한 처방과 비수술적 치료로 전인적 그리고 심신의학적 어쩌면 종합예술적으로(?) 접근하여 이들을 정상적인 생활로 복귀시킬 수 있는 의학, 거기에 한의사들 중에는 인류애적인 따뜻함까지 갖추고 있는 자들이 유독 많으니 이 또한 얼마나 대단한 장점인가?!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바로 좋은 한의학을 실천할 수 있는 좋은 한의사들이다. 모든 일상이 의료화 되어가는 이 시대에 의치한약수에서 ‘한’ 글자를 뺄지 말지는 한의사들이 아닌 의료소비자들에게 달려 있다. 실력 있는 한의사들이 좋은 진료를 이어갈 수 있다면 의료소비자들에게 박수받을 일만 남아있다. 긴 오픈런 행렬은 소아청소년과나 명품샵이 아닌 잘 되는 한의원의 전통적인 풍광이었다. 이제는 과거형이 아닌 미래형으로 시제를 바꿔보자. “줄을 서시오!! 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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