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슬픔과 위안

기사입력 2023.06.29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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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의학 웰빙 & 웰다잉 13
    “모두 누군가를 만나고는 몸과 마음의 안식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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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은혜 경희대학교 산단 연구원

    (전 강동경희대한방병원 임상교수)

    <선생님, 이제 그만 저 좀 포기해 주세요> 저자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한의사로서의 직분 수행과 더불어 한의약의 선한 영향력을 넓히고자 꾸준히 저술 활동을 하고 있는 김은혜 경희대 산단 연구원의 글을 소개한다.


    먼저 떠난 이를 그리며 슬퍼하고 있는 사람을 위로할 때 우리는 종종 ‘하늘에서 너를 지켜보고 있을 거다’라고 말하곤 한다. 

    종교의 종류와 사후 세계의 믿음 여부를 떠나서 이 문장이 위로를 받는 사람에게 주는 영향은 작지 않다. 


    그러다가도 실패의 누적으로 인해 좌절감에 허우적거릴 때면 역설적으로 ‘하늘에 누군가가 정말로 있다면 이렇게 나를 세상에 방치해두었을 리가 없다’라는 억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결국 영혼과 사후 세계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하는 지는 우리가 살아있는 이상 그 누구도 확답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믿음’만으로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다면


    하지만 한 사람의 죽음이 영원한 이별을 뜻한다고 생각하면 그것 또한 절망적일 것이며, 이러한 이(里)차원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믿음’만으로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다면 존재에 대한 ‘사실’이 뭐가 중요한가 싶은 생각이 든다.


    암 환자에게 죽음이 도래하기 시작하면 의식이 깜빡깜빡 켜졌다, 꺼졌다 반복하는 것이 보인다. 의식의 소멸을 시사하는 많은 징후들이 있지만 그 중에 “귀신을 봤다”라고 얘기하는 경우가 꽤 자주 있다. 


    학술적으로는 섬망(譫妄) 또는 무의식이 만들어낸 상상이라고 설명하고 보통은 그러한 개념으로 설명이 된다. 하지만 우리 병원의 한 병실에서만 유독 그 ‘귀신’이 항상 같은 모양새를 띄었다. 귀신은 딱 1개만 있던 3인실 병실을 말기 암 환자 1명이 혼자 사용하고 있을 때에 꼭 나타났다. 


    그 병실을 사용하면서 처음 귀신을 보았다고 얘기한 환자가 말했었다. “선생님, 어제 저승사자가 왔다 갔어요. 근데 그거 아세요? 저승사자 여자에요. 검은색 모자를 쓴 여자요. 따라오라고 하기에 제가 안 간다고 했더니 내일은 엄마랑 같이 오겠대요.”

     

    김은혜교수님2.jpg


    기억이 만들어낸 상상에 가깝지 않을까?


    며칠 뒤 환자는 ‘어제 엄마가 병실에 왔다 갔다’고 말하며 덧붙였다. “엄마 손을 딱 잡는데 온 몸이 너무 편안해지는 거예요. 오랜만에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살 것 같다’라고 말했던 환자는 며칠 지나지 않아서 숨을 거뒀다. 하지만 오열하는 보호자들 속에서 환자 당신만큼은 얼굴에 평안한 표정을 머금고 있었던 것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이후로도 같은 상황에서 같은 병실을 사용하는 환자들은 모두 하나같이 비슷한 말을 했다. 모자 또는 갓을 쓴 여자 저승사자가 찾아왔고, 따라가기 싫다고 하니, 각자가 가장 그리워했던 사람을 데리고 다시 오겠다고 했다고. 대부분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람을 직접 만났다고 했고 그 외 일부는 직접 보지는 못 했지만 그 사람의 흔적을 느꼈다고 말했다. 


    ‘아버지의 체향이랑 매일 피시던 담배 냄새가 났어요.’, ‘어릴 때 살던 집이 보여서 들어갔더니 할머니가 갓 차리신 집 밥이 있었어요.’ 류의 흔적이었다. 


    여러 예를 듣다 보니 이러한 현상들이 기억이 만들어낸 상상에 가깝다는 결론에 점점 생각이 기울었지만, 그럼에도 일관되게 묘사되는 저승사자의 인상착의를 생각하면 가끔 병실이 오싹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한 가지 명백했던 것은 모두 누군가를 만나고는 몸과 마음의 안식을 얻었다고 말했고 편안한 임종을 치렀다는 점이다. 그 중에는 몇 달간 몸부림치게 만들던 통증이 그 만남 한 번에 모두 사라진 경우도 있었다. 


    호흡은 멈췄지만 같은 병실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편안해 보이는 얼굴을 보고 있으면 그 환상들이 사실인지 아닌지가 뭐가 중요하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환자의 경험을 같이 전해들은 보호자들이 죽음이 영원한 이별을 뜻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희망의 안도감을 내쉴 때면 도리어 저승사자의 존재가 기껍게 느껴지기도 했다. 


    내 인생에서 다시는 함께 할 수 없다는 슬픔이 유독 사무치게 다가오는 이별을 겪을 때마다 ‘제발 꿈에라도 한 번 찾아와 줬으면...’하는 바람이 들었다. 


    안타깝게도 꿈에서 보고 나면 그리움은 더 커지곤 했지만, 그럼에도 그 사람은 어딘가에서 모든 짐을 내려놓고 생애 가장 편안한 심신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을 거라고 다짐을 하곤 했다. 어찌 보면 산 사람은 살아가야 하기에 합리화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언젠가 다시 만날 때를 기대하며 먼저 쉬러 갔다고 믿는 것이 생각보다 큰 위로가 된다. 


    간절한 염원이 기적을 만들어 내


    또한 환자를 통해 비슷한 경험을 하고, 이별을 경험한 주위에서 비슷한 말을 하는 것을 보면 거듭 말하지만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가 뭐가 중요한가 싶다. 남은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는 것만으로도 바람의 역할은 충분한 것 아닐까.


    안타깝게도 이별의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극단적으로 표현하며 주변에 해악을 끼친 일들도 심심치 않게 들리곤 한다. 비이성적으로 일어난 것에는 이해를 하려 하면 안 되지만, 근본적으로 각자의 바람이, 간절한 염원이 그런 일을 하게 만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수십의 임종을 지켜본 바, 간절한 염원이 기적을 만들어 낸 것 또한 자주 경험하였다. 어떠한 염원이든 가장 애틋한 사람이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으로 재고하며 사고하고 행동하다면, 결국은 개인에게의 기적이 일어나기도, 사회에서는 선한 영향력으로 발휘할 수도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믿음이 도처에서 현실과 고군분투하고 있는 모두의 마음속에 자리 잡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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