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나누기-24] 있다 없다

기사입력 2023.06.15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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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저온 보리한의원장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공연 현장에서 느낀 바를 에세이 형태로 쓴 ‘시선나누기’ 연재를 싣습니다. 문저온 보리한의원장은 자신의 시집 ‘치병소요록’ (治病逍遙錄)을 연극으로 표현한 ‘생존신고요’, ‘모든 사람은 아프다’ 등의 공연에서 한의사가 자침하는 역할로 무대에 올랐습니다.


    의자가 놓여 있다. 작은 걸상이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의자다. 의자 곁에 그가 서 있다. 그는 의자를 가리키며 말한다. “있다.” 

    그는 의자를 오른쪽으로 옮겨 놓는다. 의자를 가리키며 말한다. “있다.” 그리고 원래 놓여 있던 왼쪽을 가리키며 말한다. “없다.”


    그는 의자를 다시 옮겨 놓는다. 그가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그는 왼쪽부터 차례차례 가리키며 말한다. “없다. 없다. 있다.”

    그는 다시 의자를 옮긴다. 있다. 없다. 의자를 멀찍이 옮겨 놓는다. 그리고 주위를 연신 가리키며 말한다. 있다. 없다. 없다. 다시 자신을 가리키며 말한다. 있다.


    꼿꼿이 선 그가 자신의 오른쪽 허공을 가리키며 말한다. 없다. 자신을 가리키며 말한다. 있다. 왼쪽으로 한 걸음 옮겨 선다. 없다. 없다. 있다. 그는 있었다가 없다. 그는 있다. 그는 무수히 없다. 허공 여기저기를 두 손으로 가리키며 두리번대며 그가 말한다. 없다. 없다. 없다. 


    “죽음은 이렇게 아무도 알 수 없는 가운데”


    이 단순한 말과 손짓으로 그는 있음과 없음, 있다가 없음, 없다가 있음, 모든 없음의 자리에 원래 존재했던 있음과 눈앞에 번연히 있다가도 일순간 사라지는 없음, 그리고 지금 가장 확실한 ‘나’의 ‘있음’에 대해 말한다. 어쩌면 있고 없음의 확연함에 등을 붙인 커다란 허무를 말하는 듯도 보인다.


    있고 없음은 무엇인가? 있고 없음을 따라다니는 시간과 공간은 무엇인가? 있고 없음을 자각하는 나는 무엇인가? 있음과 없음은 하나의 큰 얼굴인가?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다만 말한다. 있다. 없다.


    조금 젊은 시절인 듯 보이는 그는 예의 그 빡빡머리에 뿔테 안경을 쓰고 탈바가지 같은 얼굴로 무대를 열어가고 있다. “있다가 없어지는 것을 우리는 죽음이라고 합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다가옵니다만 그것이 언제 어떻게 다가올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갑자기 무대 조명이 꺼진다. “보십시오. 누가 이렇게 불이 갑자기 꺼질지 알았겠습니까?” 깜깜한 무대에는 그의 목소리만 울린다. “죽음은 이렇게 아무도 알 수 없는 가운데 이렇게,” 조명이 켜진다. “환하게 다가옵니다.”


     그가 객석을 향해 웃는다. 나는 객석에 앉아 이 공연을 본다. 말하는 마임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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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분 후 죽는다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누구도 죽음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지금 여기 앉아 있는 젊은 관객들은 제가 나이를 더 먹었으니까 제가 먼저 죽을 거라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건 억지입니다. 이따가 밖으로 나가실 때 옥상에서 벽돌 하나가 뚝 떨어지면서 누구의 머리를 때릴지, 아니면 조금 더 가다가 큰길을 건너는데 그 흔한 차바퀴 밑에 누구의 머리가 깔릴지 알 수 없습니다. 


    관객들이 웃는다. 그도 환하게 웃는다. 이렇게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인생들이 이 자리에 모인 것도 인연인데 우리 인사나 하죠. 그제야 자기소개를 하며 그가 허리 굽혀 인사를 한다. 객석에서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온다.


    아니, 저만이 아니고 같이 인사하세요. 서로 마지막 보는 모습이에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잖습니까? 객석에 앉은 사람들이 깔깔거리며 옆을 돌아보며 웅성웅성 인사를 나눈다. 나도 옆 사람에게 인사를 한다.


    그가 묻는다. 만약에 당신에게 하루가 남아 있다면 당신은 그 하루 동안 무엇을 하겠습니까? 당신에게 열 시간이 남아 있다면 그리고 죽는다면 당신은 무얼 하겠습니까? 당신에게 한 시간이 남아 있다면 그리고 죽는다면 무얼 하겠습니까? 좋습니다. 당신에게 십 분이 남아 있다면 그리고 당신은 죽는다면 그 십 분 동안 당신은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가 점점 목소리를 낮춘다. 아니면, 당신에게 일 분이 남아 있다면 그리고 당신은 죽는다면 그 일 분 동안 당신은 무얼 하겠습니까? 째깍, 째깍, 째깍, 째깍...... 눈을 감은 그가 주먹을 쥐며 얼굴을 찡그리며 점점 목소리를 높인다.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으아아아아!

    그리고는 스무 살 때 이렇게 절박하고 소중한 생명을 내던질까 생각했었다고 고백한다. 고백하는 마임이라니...... 


    “네가 가는 것이 길이라는 겁니다” 


    그 무렵 시작한 연극이 조금 재미있었으므로 그는 이 재미난 연극을 좀 더 해보기로 한다. 재미있으면 계속하는 거고, 아니면 그때 죽지 뭐. 그렇게 내디딘 발이 지금까지도 이 길을 걷고 있노라고 그는 말한다. 


    그는 미쳤다는 게 별 게 아니라고 말한다. 미쳤다는 것은 남이 하지 않는 것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미쳤다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1분의 시간이 당신에게 남아 있다. 그리고 죽음이 찾아온다면 무얼 하겠습니까? 내가 원하는 걸 하겠죠. 그게 바로 미친 것입니다. 애초에 길은 없었습니다. 길은 사람이 다님으로써 생긴 것입니다. 이건 좀 미친 일입니다. 없는 길을 가라니! 길이 없는데 가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네가 가는 것이 길이라는 겁니다.


     

    리허설 무대에 그가 앉아 있다. 찬 바닥에 양말로 발가락을 덮고 앉아 생각에 잠기던 그가 무심히 나를 돌아본다. 그는 있다. 나는 있다. 고요하고 형형한 눈빛이 그것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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