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나누기-22] 옷 한 벌을 입는 일

기사입력 2023.04.13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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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저온 보리한의원장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공연 현장에서 느낀 바를 에세이 형태로 쓴 ‘시선나누기’ 연재를 싣습니다. 문저온 보리한의원장은 자신의 시집 ‘치병소요록’ (治病逍遙錄)을 연극으로 표현한 ‘생존신고요’, ‘모든 사람은 아프다’ 등의 공연에서 한의사가 자침하는 역할로 무대에 올랐습니다.


    극장에 도착하니 공중에 바지 하나가 걸려 있다. 옷걸이에 걸린 바지는 자세히 보니 천장 에어컨의 송풍구 한쪽에 매달려 있는 거였다. 아하, 리허설 때 젖어버린 옷을 급하게 말리는 중이구나. 

     

    지하 극장의 습도와 온도를 조절하려고 리허설 시간이나 연습이 빈 시간에도 에어컨은 종종 가동되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 날 공연을 마친 바이올리니스트가 습도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춥다 덥다 말고는 그다지 공간의 환경에 신경 쓰지 않았던 나와는 다른 이야기였다. 나는 책을 낭독하고 침을 놓고 뜸을 뜨면 될 뿐. 맨발로 무대에 서야 하니 공연 직전까지 체온이 떨어지지 않게만 신경을 썼다. 

     

    “오늘은 습도가 좀 높아서 바이올린 줄이 별로였어요. 어제는 딱 좋았는데.”

    악기를 다루는 사람이라 그런지 그는 냉방과 제습에 예민했다. 관객이 느끼기에 추울지 더울지를 고려해야 하는 스태프들과 또 다른 점이었다. 그렇다 하니 장비를 돌보아야 하는 스태프는 빔 프로젝트 기계가 열을 받아 오작동을 일으키니 극장 온도를 더 낮춰 두어야 한다고도 했다. 공연 무대에 촛불을 켜야 하므로 내내 에어컨을 가동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여하튼 극장 천장에는 바지 하나가 옷걸이에 걸려서 에어컨 바람에 말라가고 있었다. 곧 있을 오후 공연 전까지 다 말라야 하므로 바지는 바지대로 바쁜 와중이었다. 


    “무기를 다 뺏긴 느낌이야”


    풀빛과 먹빛이 스민 바지는 의상 디자이너가 직접 염색한 옷이었다. 공연 내내 마임이스트는 세 벌의 옷을 입는데―물론 웃통을 벗은 채로 공연하므로 웃옷은 없다―각각의 옷은 색깔이 달랐다. 격정적인 몸짓을 하는 중간 무대에서는 검은색과 붉은색이 어우러진 바지를 입고, 또 한 번은 검은색과 흰색이 서로 번진 바지를 입는다. 무대 흐름에 따라 조명 아래 드러날 배우의 옷을 고민하는 사람이 만든 작품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내가 입던 흰 가운을 가져갔으니 의상 디자이너가 따로 고민해서 만들 옷이란 게 없었다. 흰 가운과 맨발. 그거면 되었다. 가운 속에 입을 옷이야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날씨를 가늠하지 못해 여벌옷을 가져갔는데 며칠간의 공연 동안 별 쓸모없이 숙소에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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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은 마임이스트의 바지가 젖은 것처럼 공연 중에 내 무릎 또한 젖어야 했는데, 물에 젖은 얼룩이 신경 쓰이지 않을 옷을 공연 내내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걸 리허설 때야 알았다. 마임이스트 선생은 극장 바닥을 물바다로 만들기로 작정을 하신 거였다. 

     

    내가 할 일은 젖은 바닥을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조심 디뎌 걸어 나가는 것과 축축한 무릎과 냉기를 잊고 선생과 마주 앉아 공연을 하는 것. 온몸이 젖은 채로 공연장 바닥을 뒹굴어야 하는 노년의 선생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 말랐어? 그래, 다행이다.” 

    스태프 한 사람이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바지를 내려드리자 선생이 안도의 숨을 쉬었다. 하얀 방호복을 입고 고글을 쓰고 마스크를 하고 장갑과 덧신을 착용한 채 공연을 했던 이전과 달리 맨몸을 고스란히 내보여야 하는 이번 공연을 앞두고 선생은 심정을 솔직하게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무기를 다 뺏긴 느낌이야.”


    “그래도 이렇게 또 한 번 가보는 거지 뭐”


    선생이 홀로 연출하고 홀로 연기할 때의 작품과 결이 달라진 이번 공연에서 그는 연출과 의상과 음향과 조명 등등의 담당자들과 협업을 하는 중이었다. 홀몸으로 무대를 감당하던 연기 인생에 처음 새로운 도전을 하는 차에 그는 바지 하나 걸친 맨몸으로 관객을 맞이해야 했다. 작품을 그 몸 하나하나에, 관절 하나하나 근육 하나하나에 실어야 했다. 고스란히 조명 아래.

     

    “그래도 이렇게 또 한 번 가보는 거지 뭐.” 선생이 힘주어 말할 때, 어떻게든 부딪치고 탈바꿈해 보려는 한 배우의 외로운 다짐을 엿보았다.

    장 쥬네가 쓴 희곡 <하녀들>의 등장인물은 모두 셋이다. 두 명의 하녀가 자신들이 모시는 ‘마담’을 살해하려는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자매인 그들은 마담이 집을 비우면 마담의 방에서 마담의 옷을 입고 마담의 보석을 걸치고 연극을 한다. 연극은 둘이 즐기는 놀이인데, 동생이 마담 역할을 하며 하녀를 희롱하고 언니는 하녀 복장으로 마담의 비위를 맞춘다. 결국 마담을 살해하는 것이 두 사람이 즐기는 각본의 결말이지만, 매번 살해 직전에 시간에 쫓겨 극의 완성을 맛보지 못한다. 


     “그것이 연극이고, 인생이기도 한 것처럼”


    검은 옷의 하녀가 앞치마를 벗고 걸치는 마담의 붉은 드레스. 꽃으로 장식된 방에서 걸치는 마담의 모피와 빨간 구두와 목걸이. 그러나 시간이 되면 구두코를 맞추어 신발을 정리하고 옷걸이를 매만져야 하는 하녀들은 동경과 분노의 대상인 마담을 실제로 살해하려 하나 실패하고 마는데, 실패는 실패로만 끝나지 않고 그들은 궁지에 몰리게 된다. 자매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동생은 마담의 옷을 다시 입는다. 마담의 흰 공단 드레스를 걸친 동생은 마담의 말로 언니인 하녀에게 명한다. ‘독약이 든 그 차를 다오.’ 광기에 들린 그는 ‘이 마지막 순간을 내 뜻대로 쓸 테야’라는 의지대로 마담인 그 자신을 살해한다. 

    오랜 세월 장 쥬네의 <하녀들>을 맡아 온 연출가는 말했다. “작년부터 마담을 코믹하게 풍자해 보고 있어요. 하녀들이 보기에 마담은 뭘 하든 웃긴 존재니까.”

    하녀는 마담의 옷 한 벌로 마담이 되고, 그 옷에 담긴 옷의 주인을 살해한다. 그것이 연극이고 또한 인생이기도 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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