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나누기-20] 그대로 본다는 것

기사입력 2023.02.16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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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저온 보리한의원장


     

    [편집자 주] 본란에서는 공연 현장에서 느낀 바를 에세이 형태로 쓴 ‘시선나누기’ 연재를 싣습니다. 문저온 보리한의원장은 자신의 시집 ‘치병소요록’ (治病逍遙錄)을 연극으로 표현한 ‘생존신고요’, ‘모든 사람은 아프다’ 등의 공연에서 한의사가 자침하는 역할로 무대에 올랐습니다.


    비 그친 아침이다. 유리창 밖으로 하늘이 낮게 드리워져 있다. 오후 3시 공연. 다른 층에 머무는 선생께 아침을 어떻게 드실지 여쭙는다.

    “우리가 3시 공연이지? 내가 공연 다섯 시간 전부터는 속을 비워야 해. 가볍게 먹을 만한 식당이 있나 찾아보고, 없으면 간단히 요기만 할게요.”


    혼자 나서서 지하철로 향한다. 골목은 한산하고 공기는 촉촉하다. 지난밤 숙소로 오는 길에 선생은 지하도 대신 바깥공기를 쐬면서 걸을 수 있는 길을 알려주셨다. 


    “이쪽 출구로 나오면 조금 돌아가야 하는데 그래도 지루한 지하도보다 낫잖아. 골목 풍경도 보고. 자아, 여기까지 오면 조그만 맥줏집이 나와요. 저 앞에 편의점 보이지? 거기서 왼쪽으로 꺾으면 숙소가 나와. 어렵지 않지?”


    선생의 말씀이 맞다. 환한 지하도를 앞만 보고 걸으면 공간감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바쁘게 걷는 사람들. 출구를 향해 열심히 옮겨 딛는 걸음들. 초행이라 휴대폰 지도에 코를 박고 걸어야 하는 나는 더욱 그렇다. 


    걷고, 보고, 느끼라. 


    “저쪽으로 조금 더 가면 외국인들이 모여 사는 거리가 있어요. 나는 일부러 그쪽으로 다녀. 그리로 가면 골목길 냄새부터가 달라. 가게마다 나오는 독특한 음식 냄새가 있거든. 사람들 표정이나 몸짓도 보고, 말소리도 듣고. 그런 게 재미있지.”


    선생이 가르쳐 준 길을 거꾸로 짚어가며 나는 문 닫힌 가게들과 간판을 구경한다. 가로수와 담벼락의 무늬를 구경한다. 걷고, 보고, 느끼라. 발바닥과 콧구멍과 귀와 눈이 감각한 것들이 나의 나날을 이루는 하나하나가 된다. 


    연출가가 알려준 식당은 작은 고기국숫집이었다. 이 동네를 두루 꿰고 있는 그는 음식에 대해 진정한 애정을 가진 것처럼 보였는데, 손수 요리한 음식으로 사람들을 초대해 먹이는 즐거움을 이야기할 때는 두 눈이 기쁨으로 출렁거렸다. 그는 대여섯 곳 식당을 손으로 꼽으며 꼭 한번 가보라고 했다. 그때마다 각각의 추천 메뉴를 말하며 침을 삼키듯 행복한 표정을 지은 것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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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당은 작은 테이블이 네 개. 그나마 공간을 아끼려 등받이 없는 의자를 식탁 아래로 밀어 넣었다. 주인은 이제 막 문을 열었다며 나에게 책을 권했다. 그랬다. 물이 아니라 책을 권했다.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한쪽 구석에 몇 권의 책과 노트가 있었다. 커다란 그림책들이 눈에 띄었다.


    어? 어? 나 저 사람 아는데?


    “정은혜 작가 책이네요.”

    “예전부터 알던 친군데 어느 날 보니 유명해져 있더라고요.”

    주인이 주방에서 나를 향해 웃었다.


    티브이 드라마에 다운증후군 역할로 나온 다운증후군 배우. 그것만으로도 충격이었는데 연기까지 제법 잘 해낸 배우. 나도 이 친구를 예전부터 알고 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데도 그렇다. 마치 그의 성장을 곁에서 지켜본 사람처럼.


    아이들이 어렸을 때 꽤 많은 책을 읽혔는데 그중에는 매달 발행되는 어린이 잡지도 있었다. 만화도 듬뿍 들어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은혜의 성장일기였다. 성장일기라기보다 육아일기라고 해야겠다. 다운증후군 딸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그날그날의 고되고 행복한 이야기를 만화로 연재했다. 장차현실이라는 엄마의 이름도 또렷이 기억난다. 


    태어나서, 기어 다니고, 말을 배우고, 다운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받고, 사춘기를 겪고, 말을 안 듣고, 엄마에게 따박 따박 말대꾸를 하고, 화장을 하고, 뜨개질을 배우고, 우는 엄마를 달래고, 엄마의 남자친구를 감시하고, 엄마의 결혼을 축하하고,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삐뚤빼뚤 사람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그 모든 과정을 나는 지켜보았다. 그러니 어떻게 모르는 사람이겠는가. 그의 말과 표정과 상처와 고민을 전부 보고 느꼈는데. 그래서 드라마에 그가 나왔을 때 나는 이럴 수밖에 없었다. 어? 어? 나 저 사람 아는데?


    사람을 안아주는 게 좋아요.


    장애인 역할을 장애인이 맡은 이 사건을 위해서 작가와 피디와 동료 배우들이 어떤 정성과 노력과 시간을 쏟아 부었는지는 훨씬 뒤에 알았다. 그의 등장만으로 우리 인식에서 굳고 높은 벽 하나가 순식간에 무너졌다. 숨겨졌던 존재를 눈앞에 끌어내 보이는 일. 모르는 척하던 것을 당겨와 말 걸고 손 잡히는 일. 하물며 진실하고 아름답게 그려 보이는 일. 어떤 이들은 그런 일을 해내고 만다. 


    그림책 속 그림은 선이 굵고 다부지다. 색이 아름답고 표정이 살아 있다. 그는 본 대로 그린 것 같다. 꾸밈이나 덧칠이 없다. 눈앞의 사람을 그대로 보는 힘이 그에게는 있는 것 같다. 그대로 본다는 것. 얼마나 어려운가. 


    ‘사람을 안아주는 게 좋아요./ 사람을 안으면 제가 따뜻해지죠./ 따뜻하면 기분이 좋아요./ 포옹은 사랑이에요.’ ‘울 때는 울어야 한다./ 기쁠 때는 기뻐야 한다./ 나도 참 모른다./ 그만해야지.’


    이 아름다운 사람은 이렇게 자기소개를 했다. 

     

    ‘1990년 11월 18일 날 서울 제일병원에서 태어났습니다./ 2013년 2월부터 엄마 소꿉 미술학원에서 그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문호리 리버마켓에서 니얼굴 캐리커처 그림을 그렸습니다./ 8월 더운 날 처음 그렸습니다. (...) 청소 일을 열심히 해서 돈도 벌었습니다./ 발달장애인 친구들과 같이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한지민 쌍둥이 언니 영희 연기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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