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저온 보리한의원장
[편집자 주]
본란에서는 공연 현장에서 느낀 바를 에세이 형태로 쓴 ‘시선나누기’ 연재를 싣습니다. 문저온 보리한의원장은 자신의 시집 ‘치병소요록’ (治病逍遙錄)을 연극으로 표현한 ‘생존신고요’, ‘모든 사람은 아프다’ 등의 공연에서 한의사가 자침하는 역할로 무대에 올랐습니다.
서울국제공연예술제(seoul performing arts festival)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줄여서 스파프(SPAF)라고 불렀다. ‘스파프의 문제작, 모든 사람은 아프다’. 공연 프로그램에 안내된 우리 작품의 타이틀이었다.
우리는 모사프라고 줄여서 불렀다. 모사프라고 부르니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행사인 듯한 착각이 들었다. ‘스파프의 모사프!’ 그렇게 말하고 나서 우리는 경쾌하게 웃었다.
연출, 작, 공동연출, 무대감독, 무대미술, 드라마트루기, 의상, 조명, 음향, 영상, 사진, 디자인, 제작·홍보, 무대 크루. 공연 3주 전부터 열린 단체 채팅방에 속속 들어와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의 분야별 명칭이었다. 무대 공연이 처음이 아니지만 세세하게 나뉜 전문 영역을 보자니 낯설기도 하면서 묘한 감사가 느껴졌다.
말하자면 이번에는 큰 판에서 제대로 놀게 된 셈인데, 하나의 작품을 공연하기 위해서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열정을 쏟아붓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뒤늦게 새삼스레 깨달은 것이다.
이것은 마치 아마추어에서 프로 리그로 진출한 느낌, 인디신에서 수면 위로 올라온 느낌 같은 것이 함께 들게 했다. 더불어 조금 더 가미된 긴장감, 조금 더 무거워지는 책임감 따위가 내 몸을 계속 따라다녔다.
나는 왜 그토록 맞아야 했던가?
나는 드라마트루기라는 단어를 검색했다. 일본 애니메이션 주제가인 듯한 가사가 화면에 떴다. 한참을 뒤지자 ‘드라마트루기-극작술’이라는 문구가 보였다. 연극의 전체 뼈대를 구조적으로 만들어 세우는 극작의 영역인가보다 짐작했다.
드라마트루기를 맡은 분은 연출과 작가로 이전부터 활동해온 경력자였다. 그는 우리의 연습공연을 참관한 뒤 작품을 1부, 2부, 3부로 나누고, 암전되고 다시 열리는 장면마다 해석하고 분석하는 글을 썼다.
지방에 멀리 떨어져 있어서 채팅방에서밖에 일의 진행 상황을 가늠할 수 없던 기간에 시시각각 올라오던 자료들 사이에서 나는 그가 쓴 문장에 조심스럽게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맞다. 그건 아주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작품의 모티브가 되는 글을 쓴 원작자이지만 그것이 무대 작품으로 변형되는 이상 더는 나의 작품이 아니었으므로. 게다가 나는 연습실에 같이 앉아 있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무엇보다도 드라마트루기라는 영역을 모르는 사람이므로.
그는 마임이스트가 온몸을 맞으면서 나뒹구는 고독하고 쓰라린 장면에 대해 이렇게 썼다.
‘구타/ 구타의 기억들. 내가 처음 누군가에게 맞았던 때가 언제던가? 여섯 살? 일곱 살? 나는 왜 그토록 맞아야 했던가. 나의 서투름이 매를 부른다. 나의 모자람이, 나의 무지가 구타를 유발한다. 나의 분노가, 나의 게으름이, 나의 욕심이, 나의 무책임함이 폭력이 되어 돌아온다. 물리적 폭력, 그리고 그보다 더한 정신적 폭력, 언어폭력. 아직도 내가 감당해야 할 구타가 남아있을까?’
도라지꽃 참 곱죠? 싱싱한 푸른 멍…
나는 배우가 몸으로 바꾼 그 장면을 시 ‘타박’에서 이렇게 썼다.
‘도라지꽃을 아프지 않게 볼 수 있게 된 건 몇 년 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핏물 주머니지요. 베면 쏟아집니다. 때리면 터지지요. 터져 고이면, 푸릅니다. 푸른 보랏빛이요. 네, 저는 푸른 보랏빛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 마지막으로 맞아본 게 언제예요? 맞아본 적 있냐고요! 도라지꽃 참 곱죠? 싱싱한 푸른 멍이에요. 거기서 멍을 빼내는 데 삼십 년이 걸렸어요.’
‘구타유발자’라는 영화제목이 오래전 나를 찌르던 것과 비슷한 이유였을까? 나는 단체 채팅방에서 그에게 물었다. “이 제목과 내용들은 내부용인가요? 관객에게도 전달되나요?”, “매일 연습하면서 내부적으로 공유되는 내용입니다.”, “아하, 그렇군요. 나의 모자람이, 나의 무지가 구타를 유발한다는 문장이 좀 무서워요. 자칫 원인을 맞는 자에게서 찾는 듯해서요. 모든 맞는 이는 정당하다는 뜻은 물론 아니고요. 제가 문자적 인간인지라 쓰신 글 읽다가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진행에 방해가 안 되었기를 바라며...”
“네. 구타를 포함한 게시 내용들은 이제 막 장면 재구축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에 말씀하신 문구들은 표현의 작은 출발점이지 결과물이 아닙니다. 오늘 연습에서 다시 또 구체적인 내용들을 논의해야 하구요. 전해주신 말씀 충분히 숙지하도록 할게요. 저도 태생이 문학인지라 역시 말과 글에 예민하긴 합니다.”, “하핫, 감사합니다.”
일면식도 없는 분과 온라인상에서 이런 대화를 나누느라 보이지 않는 진땀을 빼고 있을 때 연출가 선생께서 우리의 대화에 이렇게 글을 단다. “감사합니다!!”
연출가는 전체 판을 보고 있다. 그리고 슬쩍 개입해서 구성원들을 독려하고 판을 조절한다. 나는 겨우 한 번의 노파심을 내비쳤지만, 연습 현장에서는 연출과 배우, 무대감독과 드라마투루기의 얼마나 많은 의견 충돌과 기 싸움이 있을 것인가.
무대를 위해 자신들이 가진 최선의 것 내놓아
나는 그 바닥에서 몸이 굵은 사람들의 능력과 열정을 믿기로 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창작자였다. 그것은 자기 분야에서 몇 년 몇 십 년을 온몸으로 싸워 온 전사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베테랑이다. 공연 작품 하나를 위해 모였으며, 무대를 위해 자신들이 가진 최선의 것을 내놓을 것이다. 나는 겨우 씨앗 하나 뿌린 사람일 뿐이다.
그리고 어느 하루, 홍보 제작 담당자는 이런 내용을 채팅방에 알린다. ‘여성 20대 예매비율 최고’, ‘10월 10일 공연 매진!’
관객에게 나눠줄 공연 팸플릿에 실을 소회를 적어달라는 연락에 나는 이렇게 몇 줄의 문장을 적었다.
“시가 몸을 얻었다. 선율을 얻고, 공간을 얻었다. 이 물질성과 현존성을, 그리고 가슴에 남을 영원한 찰나를 만들어주신 여러 전문가들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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