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나누기-12] 초와 칼

기사입력 2022.06.16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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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저온

    보리한의원장


    [편집자 주] 본란에서는 공연 현장에서 느낀 바를 에세이 형태로 쓴 ‘시선나누기’ 연재를 싣습니다. 문저온 보리한의원장은 최근 자신의 시집 ‘치병소요록’(治病逍遙錄)을 연극으로 표현한 ‘생존신고요’, ‘모든 사람은 아프다’ 등의 공연에서 한의사가 자침하는 역할로 무대에 올랐습니다.


    대기실은 한가로운 듯 분주하다. 출연진들은 무대에 나가 각자의 위치와 조명을 체크하고, 음향 담당 스태프와 함께 마이크 볼륨을 점검하고 대기실로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무대감독을 맡은 이가 무대와 대기실을 오가며 배우의 동선을 재차 확인한다. 더불어 시시각각 진행 상황을 알린다.

     

    대기실 한쪽 벽면 전체는 커다란 거울이다. 거울 위에는 밝은 조명등이 켜져 있고, 다른 벽면에는 무대 상황을 보여주는 흑백 모니터가 달려 있다. 모니터에는 조명을 비춘 빈 무대가 보인다.

     

    거울 아래 탁자에는 출연자들의 무대 소품이 줄지어 놓여 있다. 마스크와 하얀 면장갑이 있고, 손바닥에 붉은 고무가 칠해진 목장갑도 보인다. 이마에 두를 끈과, 덧신, 크고 풍성한 하얀 깃털이 있고, 시멘트 가루가 담긴 포대와 흙손, 그리고 초와 칼이 있다. 바이올린이 있고, 공연복이 있고, 물과 허기를 메울 간식이 놓여있다.

     

    물어뜯을 손톱들을 가지런히 정리해 놓고, 마임이스트가 이번에는 칼을 쥐고 있다. 커다란 식도다. 그는 거울 앞에 서서 칼을 허리 뒤에 숨기고 이리저리 자세를 살핀다. 눕혔다가 세웠다가 칼끝의 위치를 가늠하고, 칼날의 방향과 칼을 꺼내 쥐었을 때의 위치를 확인한다. 칼끝을 엉덩이로 향하게 해서 비스듬히 세운 다음 왼손으로 칼을 누르고 돌아서서 우리에게 묻는다.

     

    “이렇게 하면 안 보이겠지? 조금 더 세울까?”

     

    칼을 허리에 붙인 채로 앉았다가 일어섰다가 칼끝이 바닥에 닿는 위치를 확인한 뒤 그 자리를 표시한다. 이것은 마임이스트가 몸에 칼을 숨기기 위한 준비다. 그는 무대에서 식칼을 들고 연기한다.


    ◇ 그것은 나일까?

     

    구급차 소리가 지나간 컴컴한 무대. 비밀번호를 누르는 도어락 소리. 텅 빈 무대에 사각의 조명으로 고독한 한 뼘의 집이 생기고, 그가 집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사각 조명은 더욱 작고 좁아진다. 어둡고 차가운 방에 그가 들어가 눕는다. 마치 관처럼 보이는 방에서 그가 죽음 같은 잠을 잔다.

     

    그러다가 벌떡 상반신을 일으킨다. 다시 스르륵 눕는다. 다시 그가 벌떡 상반신을 일으킨다. 그러기를 몇 차례. 그는 고통으로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잠들기 위해 누웠다가 벌떡 몸을 일으켜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고통으로 그의 상반신은 비틀린다. 얼굴이 무너진다. 꺾이고 뒤틀리는 두 팔이 자신의 몸을 긁고 후벼 판다. 바이올린의 현이 긁히고 비틀리듯 고통스러운 소리를 낸다.

     

    가슴팍을 쥐어뜯던 그가 고통에 가득 찬 일그러진 얼굴로 마침내 무언가를 끄집어낸다. 왼쪽 가슴께를 비틀린 손가락으로 집요하게 헤집고, 실마리 같은 것인지, 솜뭉치 같은 것인지, 핏덩이 같은 것인지, 살아 꾸물거리는 생물 같은 것인지, 마침내 주먹만 한 무언가를 뜯어내듯 꺼내는데, 왼손 가득 움켜쥔 그것은 내 눈엔 마치 그 자신의 심장처럼 보인다.

     

    그는 그것을 마침내 본다. 그것은 제 몸에서 끄집어낸 것이며, 그를 벌떡 일으켜 잠 못 들게 한 것이며, 고통으로 뒤엉킨 그를 갉아댄 것이다. ‘죽이고 싶은 인간, 저도 있어요’라고 무대 첫머리에서 말해 둔 무엇이며, 아아, 그래서 그것은 제 몸에 살다 나온 심장과도 같다.

     

    보고 있는 나의 목울대가 치미는 것 같다. 피비린내가 나는 것도 같다. 몸의 고통이 그에게서 나에게로 전해진다. 나를 파먹던 그것은 그것이자 나였을까? 이제 그것을 찌르는 일은 나를 찌르는 일일까? 나를 쪼개 꺼낸 것을 직면하는 일의 참담함.

     

    푸른 조명 아래서 그는 상반신을 일으켜 앉은 채, 왼손에 움켜쥔 것을 응시한 채로, 천천히 오른손으로 칼을 꺼내 든다. 칼을 어깨까지 들어 올린 그가, 오른손에는 칼을 들고 왼손에는 무언가를 움켜쥔 그가, 정면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한다. 두 다리를 뻗은 채로 조금씩, 1센티쯤일지, 2센티쯤일지, 미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엉덩이를 밀어서 조금씩 객석을 향해 나아간다. 그의 머리 위로 꽃잎이 떨어져 날리고 무대가 서서히 암전된다.


    ◇ 초와 칼

     

    엉덩이 뒤쪽에 칼 꽂을 자리를 잡은 다음 그는 입고 있는 방호복에 커다란 주머니를 덧댄다. 주머니는 하얀 방호복과 같은 색으로 만들어 양면테이프로 고정한다. 바이올리니스트가 곁에서 주머니 다는 일을 돕는다. 칼의 위치를 더듬어 재느라 예리한 칼끝에 방호복이 군데군데 찢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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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험하지 않겠어요?”

     

    “아냐, 괜찮아.”

     

    무대에 칼이 등장하는 일이 예사롭지는 않다. 그 칼이 음식을 요리하는 일이 아니라 날을 번득이며 객석을 향하는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마음에 얼마나 많은 칼을 품고 사는 인간들인가, 우리는.

     

    거울 아래 초와 칼이 나란히 놓여있다. 배우는 종이에 싼 하얀 초와 역시 종이에 싼 식칼을 조심스레 챙겨왔을 것이다. 초 한 자루, 칼 한 자루. 이렇게 나란히 놓고 보니 칼도 초 한 자루 못지않게 깨끗하고 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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