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본란에서는 한의표준임상진료지침 사업단에 참여한 조기호 경희한의대 내과학 교수에게 한의표준임상진료지침의 발전 방안에 대한 의견을 싣는다.
요즘 우리는 운전대를 잡으면 바로 시동을 걸지 않고 ‘내비게이션’부터 맞춰 둔다. 이 ‘내비게이션’은 요금은 조금 들더라도 더 빨리 갈 것인지,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돈이 들지 않는 길로 갈 것인지, 아니면 둘러가더라도 신호등 없는 자동차 전용도로로 갈 것인지 등 몇 가지 선택지를 제시한다. 기존에 내가 익히 알던 것과는 전혀 다른 길로 안내하기도 하지만, 운전자는 믿고 그대로 간다. 그것이 그 시간대에 최적의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 믿음은 오로지 데이터의 집적에 따른 결과에 의존한다. 설사 생각한대로 가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다음에 또 같은 방법을 취하곤 한다. 그만큼 현재 우리는 데이터가 지배하는 세상에 산다. 한의사의 진료행위도 이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한의사는 최적의 치료방법을 찾기 위하여 끊임없는 공부를 해야만 하는 숙명의 직업이기도 하다.
환갑이 넘은 필자는 지난 20년간 한의진료 영역에서 데이터 구축이라는 큰 숙제를 안고 살았다. 구체적으로 근거중심의학이라는 분야의 해외 저작물 소개에서부터 우리의 현주소를 되돌아 볼만한 출판물을 개인적으로, 또는 학회의 일원으로 출간함으로써 다양한 방식으로 이 분야에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작업은 어디까지나 구슬에 지나지 않으며, 이 구슬을 보배로 만드는 것은 “진료지침 작성”이라고 생각해 왔다.
일차적으로 진료지침 작성은 학회에서 해야만 할 책무 중 하나이다. 그러나 꼭 내부자의 고발이 아니더라도 이 좁은 바닥에서 숨길 것 없이 우리 한의 관련 학회의 사정을 둘러보면 인력 풀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며, 그동안 이런 작업을 반드시 해야만 한다는 책임의식이 희박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던 참에 한의표준임상진료지침 사업단이 구성되었고, 대대적인 진료지침 작성사업이 진행되게 되었다. 필자는 이 사업의 언저리에 “파킨슨병”을 주제로 참여하게 되었다. 이렇게 진료지침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일전에 한국한의학연구원과 공동으로 진행한 중풍 표준화 사업의 하나로서 2004년 일본뇌졸중합동위원회의 진료지침을 2005년 번역하여 제출한 적이 있어서였다.
또한 필자의 세부 전공인 파킨슨병의 일본 진료지침이 벌써 여러 번 개정되는 것을 보며 각 개정판을 통해 스스로 머릿속 지식을 업데이트해왔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진료지침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여러 국가의 진료지침 중에서도 유독 일본 진료지침을 참고해온 것은 그래도 한의 치료에 대한 언급이 있어 서양의학을 하는 사람들이 한의학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나의 삶의 궤적을 먼저 적은 이유는, 우리 한의계 역시 그동안 ‘근거중심의학’이니, ‘진료지침 작성’이니 하는 문제에 많은 고민을 한 끝에 한의표준임상진료지침 사업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제 5년이라는 1차 사업 기간이 마무리되면서 그 결과물에 대한 귀추가 주목된다. 필자도 한 꼭지를 차지하고 있어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필자는 진료지침 개발과정에서 느꼈던 몇몇 문제점을 지적하며 앞으로 이 한의표준임상진료지침을 한의계가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그 앞으로의 시선에 대하여 졸견을 피력하고자 한다.
◇한의학의 임상 가치, 세계와 공유하는 지식 체계로 만들어야
먼저, 진료지침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를 하겠다. 진료지침 작성의 일차적이고 고유한 목적은 각 학회가 회원들이 임상진료에서 활용할 수 있는 ‘내비게이션’을 제시하기 위함이다. 그동안 각 학회 차원에서도 여러 차례 시도해 보았으나, 그 자료의 빈약성과 열악함 때문에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던 참에, 국가 펀드가 이루어짐에 따라 이 진료지침 작성이 시행된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사업단 검토위원과 연구자의 스탠스가 모호해지면서 간극이 벌어진다.
연구자의 입장에서는 국내 한의치료 자료보다 중국이나 일본 자료 의존도가 절대적으로 높을 수밖에 없다. 반면, 검토위원들은 우리 자료 또는 한의사가 익숙한 방법을 주로 요구하게 되는데, 이러다보면 배가 산으로 올라간다. 어디까지나 가이드라인 작성은 출판된 자료에 우선권을 두어야 하며, 해도 해도 안 되면 전문가 의견까지 용납하는 방식으로 작성해야 한다.
역으로 생각하면 이러한 작업을 계기로 한의 진료 영역을 중의학이나 일본 한의학까지 확대할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는 긍정적인 면도 다분히 있다. 이 사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부수적인 수확은 한국 한의임상을 국내에만 국한된 한의학이 아닌 동아시아 전통의학으로, 더 넓혀 갈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는 데 있다. 따라서 국내 한의계에는 없는 자료를 억지로 찾게 할 것이 아니라, 앞으로 이번 사업결과를 토대로 더 확장된 다음 단계로 나가는 발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진료지침 검토과정 상의 문제점도 지적하고 넘어간다. 그동안 사업단은 검토위원 위촉 시 양방의사나 그쪽에 기울어진 의견을 가진 학자를 필수로 포함시켜 양쪽의 의견 균형을 잡아 평가를 해나가는 모양새를 취해 왔다.
좋은 제도라고는 생각하나, 의료이원화 체제인 우리나라에서는 이 경우 개인의 의견을 제쳐두고 집단의 의견을 대변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렇게 위촉되었던 위원들의 발언을 보고 듣자면 여우의 신포도 우화가 생각난다. 이제 우리 한의계도 꽤나 성숙해졌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외부 의견에 휘둘릴 것이 아니라 우리 한의계 나름의 의견이 반영되도록 헤드쿼터로서 사업단이 중심을 잡아야 한다. 검토위원들의 한마디 말에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보면 필드에서 작업하는 우리 연구자들은 맥이 풀어지고 만다.
이제 진료지침 형식을 짚어보고자 한다. 진료지침 작성 포맷은 그냥 우리 식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 식으로 해서도 안 된다. 설사 우리 식으로 하였다 하더라도 이를 쳐다볼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러므로 당연히 이런 작업포맷의 기본 형식은 누구나 그 ‘개념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하고, ‘분류체계’가 바로 세워져야 한다는 두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이를 벗어나면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하여도 헛바퀴만 돌 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사업단에서는 2017년 판을 예비인증, 금년도 판을 최종인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엄청난 혼란을 야기했다. 용어 사용의 의도와 방법을 아무리 설명하고 항의하더라도 그렇게 요구했다. 1판, 2판이라는 쉽고 글로벌한 용어가 있는데도 왜 그렇게 고집하는지 모르겠다. 진료지침 개정에 있어 밀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자료를 업데이트 해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기본 취지임을 잘 모르는 듯하다.
본인의 경험 지식에 추가적으로 생산된 자료를 피드백해가는 것은 오늘날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당대 사조가 그렇다. 임상의학이라면 표준의학인 서양의학이든, 보완 · 대체의학이든, 전통의학이든, 모두 이 당대 사조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간혹 치료법 측면에서 획기적이거나 각광을 받더라도 앞서 말한 전제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유사(pseudo)라는 접두사가 붙게 되고, ‘뉴노멀’로 승격되지 못한다.
양의사와 한의사로 나뉘어진 이 의료이원화 체계에서 전통의학, 즉 한의 치료의 가치를 어떻게 ‘공유할’ 것이며, 어떻게 ‘분류할’ 것인가 하는 과제는 한의학 전공자에게 크나 큰 책무이며, 이런 면에서 우리 한의학 전공자들은 선현들에게 엄청난 부채의식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작업은 순전히 우리만의 몫이다. 전통의학은 각국의 전통, 관습, 문화, 역사, 철학에 따라 달리 전승되고 계승되는 특징이 있지만, 한의학의 임상 가치를 국가적인 테두리를 넘어 세계의 지식인들과 ‘공유할 수 있는 지식’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 현실에 적합한 연구 방법론을 장착하여야만 한다. 또한, 경계를 넘나드는 체계 확립도 중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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