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 분쟁은 왜 계속될 수밖에 없는가?

기사입력 2019.12.12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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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영 교수 경희대학교 사회학과 (‘하이브리드 한의학’ 저자)


    한의학 분쟁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왜 그럴까? 의료이원화 체계에서 한의학은 해석적 유연성(interpretive flexibility)을 가진 ‘경계 사물’(boundary object)이기 때문이다. 1990년대 있었던 한약 분쟁의 예를 들어보자. 1993년 초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기 바로 직전 ‘약국에서 재래식 한약장 이외의 약장을 두어 깨끗이 관리하여야 한다’는 약사법 시행 규칙 변경이 발표되었다. 1980년 3월 한의사와 약사 간의 영역 다툼의 결과로 신설된 이 시행규칙은 상당히 애매하여 해석의 여지가 존재했다. 이 구절은 한의계와 약사계의 사활을 건 싸움을 이끌었던 대단히 중요한 문구로 이미 1970년대 만들어질 때부터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1970년대 한의계는 약사의 한약에 대한 임의조제가 성행하자 이를 막기 위해 정부를 압박했고 그 결과 이 시행 규칙이 만들어졌다. 한의계는 당시 약정국장의 말을 인용하여 “원칙적으로 첩약을 짓는 행위는 약사의 영역이 아닌 한약업사나 한의사의 영역이므로 약사로 하여금 첩약을 조제하지 말도록 한 것”으로 해석했다. 


    ‘한약’ 분쟁의 여지 많은 ‘경계사물’에 해당 

    하지만 약사 측은 보건복지부의 말을 인용하면서 “약국이 한약방처럼 한약만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것으로 비춰지는 것을 막고, 약국에 개량된 약장을 두어 한약의 과학적 발전을 유도하는 취지에서 신설한 것이며 약사의 한약 취급 자체를 제한한 것은 아니었다”고 해석했다. 약사는 ‘한약도 약’이라는 논리를 내세우고 한의사는 한약은 한의학 전문 지식에 의해서만 조제가 가능하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위의 구절만으로 한약의 조제가 한의사에게 독점적으로 있는지 아니면 약사법에 근거해서 약사가 모든 약을 취급할 수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곧 ‘한약’과 ‘약장’은 의료이원화 체계에서 해석적 유연성(interpretive flexibility)을 가진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한약’이 분쟁의 여지를 가지고 있는 ‘경계 사물’(boundary object)이라는 점이다. 한약뿐만 아니라 침, 의료기기, 뜸 등 역시 경계 사물이기 때문에 해석적 유연성을 낳고 분쟁을 촉발시킨다.

    경계 사물은 과학기술학(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에서 가장 인기 있고 영향력 있는 개념 중의 하나이다. 경계 사물은 해석적 유연성을 가지면서 조직적인 일(organizational work)을 하는 상황에서 합의(consensus)의 상태 없이 다양하고 이질적인 사회 세계들을 연결시켜 주는 공통의 사물, 개념, 형식을 일컫는다. 경계 사물은 구체적이면서 추상적이며, 특수하면서 일반적이며, 관습적이면서 상황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애매성을 가진다. 경계 사물은 다양한 사용을 위해 충분히 유연하면서도 공통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견실함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약하게 구조화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개념은 수잔 리 스타(Susan Leigh Star)와 제임스 그리세머(James Griesemer)가 과학적 실행에서 협동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고안한 개념이었다.  

    경계 사물은 여러 군데 걸쳐 있는 동시에 다양한 사회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한다. 경계 사물은 ‘주변성’(marginality)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인데 주변성은 다양한 세계의 멤버십을 동시에 가질 때 발생한다. 주변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한쪽을 부정하거나 양쪽을 왔다 갔다 하거나 아니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방법이 있다. 과학자들은 경계 사물을 통해 공통의 경계를 형성하고 비과학자들과 소통하고 협력함으로써 주변성 문제를 해결한다. 

     

    “한약,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전개”

    스타는 ‘경계 사물’이 되기 위해서는 해석적 유연성 외에 정보, 작업 과정에서의 필요와 준비 그리고 덜 구조화된 상황과 잘 구조화된 상황 사이의 역동성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한다. ‘경계 사물’은 조직적인 일을 하는 상황에서 완전한 합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고 준비하는 과정을 촉진시킨다. 이는 조직적 일이 덜 구조화된 상황에서 발전하게 되는데 행위자들의 다양한 번역과 협력의 과정을 거치면 보다 잘 구조화된 상황으로 변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 ‘경계 사물’들은 표준화된 과정이나 규제 등으로 변하게 된다. 따라서 경계 사물은 해석적 유연성을 가진 단어나 개념에 무조건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조직적 일을 하는 상황에 적합하다.  

    경계 사물로서의 한약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점들은, 한의사 측과 약사 측이 한약에 대해 각자 다른 해석을 한다는 해석적 유연성을 가진다는 점과 이의 조제를 둘러싸고 완전한 합의가 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조제권을 둘러싸고 법적, 행정적인 규제들이 덜 구조화 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한층 폭발적인 이유는 경계 사물로서의 한약이 두 집단에게 엄청난 이권이 걸려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덧붙여 이 문제는 전문가와 국가 간의 관계를 넘어서 전문가, 국가, 시민, 언론 간의 ‘다중적 경계 사물’이 되면서 법적으로만 해결될 것이 아니라 정치적, 사회운동적인 해결 방식에도 문을 열어주었다는 점에 있다. 곧 한약은 법적 경계 사물일 뿐만 아니라 한약분쟁을 거치면서 정치적 경계 사물이자 경제적 경계 사물이 되면서 누구도 예측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경계 사물이 한약뿐인가? 한국 의료에서 특정 의료행위, 법규, 지원 등의 활동이 한방과 양방의 경계에 걸쳐 존재하기 때문에 각 진영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 상당히 존재한다. 2010년대 있었던 천연물 신약 분쟁도 마찬가지다. 천연물 신약에 대해 한의계는 한방 처방에 근거했기 때문에 이를 ‘신한방제제’로 규정하는 반면 양방과 제약업계는 과학적, 산업적으로 광범위한 실험과 제조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신약’이라고 규정했다. ‘천연물 신약’이 한방과 양방의 경계를 넘는 새로운 형태의 바이오경제를 창출하지만 지적 재산권과 사용권을 둘러싸고 한의계, 정부, 제약업계간의 갈등을 촉발했다. 


    한·양의 의료분쟁 촉발 요인 ‘경계사물’ 차고 넘쳐  

    정부는 외국 제약업계에 비해 상당히 열악한 위치에 있는 한국 제약업계의 발전을 위해 연구개발을 대대적으로 지원해 왔지만 신약 개발의 난관에 부딪치자 ‘천연물 신약’을 통해 돌파구를 마련하려고 했다. 한약 처방을 통해 생성된 막대한 이익은 제약업계와 양방 측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한의계는 ‘천연물 신약’이 한의계의 지적 재산권을 빼앗아 갔다고 주장한다. ‘천연물 신약’은 덜 구조화되었었기 때문에 정부와 한의계는 법적 분쟁을 겪었고 타협책으로 새로운 규제를 만들었다.

    한의학과 양의학 사이에서 해석적 유연성을 가지면서 의료분쟁을 촉발할 수 있는 ‘경계 사물’은 차고 넘친다. 가령 한의사가 CT나 청진기를 사용한다든지 양의사가 침을 사용하는 행위들은 양 의료 집단간의 정치적, 법적 분쟁을 촉발시켰다. 양방 측에서는 의료 현장에서 일어나는 한의사의 물리치료, 방사선 진단, 초음파 진단기 사용, 양약 처방, 혈액 채취, 현미경 사용 등을 문제 삼아 왔다. 반면 한방 측에서는 양의사의 한약 제제 투여, 레이저침 사용, 부항 시술 등을 문제 삼아 왔다. 

    많은 의료기기와 의료 행위가 경계 사물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행정적, 법적, 정치적 해결책들이 세세하게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따라서 한의사들은 왜 한의학 분쟁이 앞으로도 계속될 수밖에 없는지를 개념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의료영역에서 경계 사물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의사들은 이런 분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덜 피곤하다.  

     

    (이 칼럼의 일부 내용은 필자의 책 <하이브리드 한의학>에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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