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에게 듣는다?안학수 한의협 명예회장

기사입력 2004.04.02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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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번의 연락 끝에 어렵게 마포구 한의원에서 마주 앉은 안학수(24,25대 1991.1~1991 12, 1992.1~1993.3) 명예회장은 당초 예상과 달리 참 편안해 보였다.

    지금은 환자 돌보는 일과 청소년을 위한 사회사업에만 몰두하고 그에게 많은 질문을 한다는게 조심스러울 것이란 선입견이 머리 속을 맴돌았다.

    한약분쟁의 출발점에 회장으로 재임했던 그에게 당시 상황을 풀어 낸다는 게 처음부터 쉽지 않을 듯 했다. 아니나 다를까. 인터뷰 내내 그는 나름대로 정리한 말 이외는 가급적 ‘말’을 아꼈다.
    굳이 지난 이야기를 꺼내 전체 한의계를 화합 차원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깊은 배려가 숨어있는 듯 했다.

    어디서부터 말문을 열까 고민하던 차.
    “한의계는 엄청난 발전과 변화를 겪어왔습니다. 역대 회장님들 고생 많이 했죠.”
    3천명의 회원들과 턱없이 예산이 부족했던 시절. “직원들의 봉급마저 줄 수 없어 매년 초만 되면 기채를 해야만 했다”는 말을 던지고는 지그시 눈을 감는다.

    “작고 하신 오승환, 김한성 회장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찡해요.”
    화두 처럼 던진 그의 얼굴엔 지난날의 회한이 잠시 머물다 가는 듯했다.

    안 회장이 협회에 첫 발을 들여 놓은 것은 지난 75년 서울시 한의사 운영위원회다. 그 후 누구보다 많은 역대 회장들과 호흡을 같이 했던 그로서는 협회 부회장직 5회, 이사직 2회 역임이란 이력에서도 엿보게 한다.

    대부분의 인생을 한의협와 함께 보낸 그로서는 그래서 누구보다 협회 돌아가는 일을 소상히 안다.
    오랫동안 협회 일에 관여한 탓에 회장재임 시절 회무 수생에 많은 도움을 얻었다며 웃는다.

    안 회장 회장 재임시절 가장 큰 이슈는 침구사법. 역대에도 그랬지만 할 일은 산적 같은데 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없는 ‘뜨거운 감자’였다. 지금 생각해도 침구사법 문제로 대부분의 시간을 국회서 소모할 수밖에 없었던 것 환경이 가장 큰 아쉬움으로 기억된다.

    “91년도였을 겁니다. 북한과 한의약 교류, 학술발표, 교수 학생 인적교류를 위해 당시 통일부에 북한주민 접촉신청을 낸 던 것이 허가가 떨어졌어요.”
    남북한이 오늘 처럼 화해무드가 조성되기 전인 시절, 통일부로부터 북한과의 접촉 허가는 지금생각해도 감회가 새로웠다.
    꿈에 부풀어 대표단을 이끌고 중국으로 날아갔지만 약속했던 북한측은 오지 않았다. 무산된 것이다.

    그렇다고 그만둘 수도 없는 일. 그 이듬해인 92년에 북한 주민 접촉 신청을 해 통일부로부터 또다시 허가를 받았다. 당시 북한 위생부 부부장과 만나 남북 한의학 교류를 타진했지만 정치적 이유 등으로 남북한의학자와의 교류는 아쉬움을 남기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하지만 북한과의 교류 무산됐을 무렵 중국 중국 중화전국중의학회와 교류협정을 조인하는 성과를 일궈냈다.

    당시 국제위원이었던 손숙영 이사와 유기덕, 윤석용 이사의 노력과 수고는 생각만 해도 고맙기만 하다. 안 회장은 이들의 도움 없었다면 활동을 못했을 것이라는 말로 감사의 뜻을 전한다.

    그후 일어난 93년 한약분쟁. 안 회장에게는 두고두고 뼈아픈 일로 각인되어 있다. 과거지사로 덮어두기엔 너무나 큰 사연이었기에 많은 말들을 가슴에 담고 절절한 세월을 흘러보내야 했다.

    약사법 시행규칙 7조 1항 7호인 ‘약국에서는 재래식 한약장 이외에 한약을 두어 청결히 관리해야 한다’는 조항 삭제가 발단돼 사상 초유의 분쟁으로 기록된 한약 분쟁은 한약과 양약의 대결이 아닌 동서양의 문화충돌로 비유될 만큼 파장은 컸다.

    연일 각 언론에 대서특필된 분쟁은 사회학자들의 연구논문의 주제가 될 만큼 사회적 파장은 엄청났던 것이다.
    한약분쟁이란 폭풍의 한 가운데 지키고 있던 그로는 많은 말들을 자제 하면서도 한 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며 말문을 연다.

    “김영삼 대통령 취임 후 ‘발효되지 않은 법령을 정비하라’는 지시가 결국 한약분쟁의 빌미를 제공한 셈이지요. 약사법 시행규칙 7조 1항 7호는 이미 1983년 관보에 실리면서 동시에 내무부 장관 법무부 장관 명의로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유보하라는 공문도 있습니다.”
    ‘한약을 깨끗이 관리하라’는 의미의 이 조항은 10년 전에 이미 존재했었지만 유보되어 오다 10년만인 1993년에 삭제된 것이다.

    계속되는 데모와 성명전 등으로 확산되면서 아직도 마음의 상채기로 남는 것은 ‘한의대생들의 유급사태’였다. 어린 그들에게 선배로서의 차마 못할 짓을 한 것 같아 아픔인 것이다.

    하지만 ‘한약분쟁은 부정적인 결과만 있는 것이 아니다’고 말한다. 한의사의 존재를 대국민에게 알렸을 뿐 아니라 복지부 내 한방정책관실 신설, 한의학연구원 설치 등 한의학에 대한 정부의 인식변화를 가져왔다는 것. 또한 대내적으로도 전체 한의계의 단결력을 비롯해 한의계를 일깨우는 계기도 되었다.

    어쩌면 그의 오랜 침묵은 ‘이같은 긍정적인 부분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미쳤다. 회장직에서 물러날 때도 굳게 입을 다물었던 이유나 현재도 할 말을 자제하는 안회장의 심중을 추측만 할 뿐이다.

    안회장은 야당시절부터 친분을 다져왔던 김영삼 대통령이 중국과 일본 방문 길에 앞서 한의학 발전을 위한 한중일 공동기금출자 제안에 큰 기대를 걸었다고 회고 한다.

    비록 일본의 거부와 중국 역시 우월한 중의학으로 나가겠다는 욕심으로 무산은 되었지만 한의학 발전의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 같아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우리나라는 의료 이원화 체계입니다. 따라서 의료법도 당연히 이원화 되어야 합니다. 한의계가 독립 한의약법 제정을 숙원사업으로 내건 것도 이와 상통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 집행진의 노력으로 ‘한의약육성법’ 국회통과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안회장. 독립 한의약법 역시 상대단체가 있어 어려움은 있겠지만 1만 한의사들이 노력하면 될 것이라며 희망을 던진다.

    한약분쟁 당시 보여주엇던 회원들의 놀라운 단결력이라면 어떠한 난관도 극복할 수 있다는 용기를 가져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부모님을 보내드리고 3개월 동안 이유도 불안하더군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부모님은 정신적인 지주였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무 말도 않고 관여하지도 않았지만 존재하는 것만으로 편안함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는 그는 한의계 원로도 이와 같은 존재가 않겠느냐 반문한다.

    한의학의 흐름에는 룰이 있고 역사가 있는 것처럼 원로의 존재는 이같은 룰을 지탱해주는 지주와 같다고 말한다.
    그로서는 요즘 대의원에 중진들이 배제되는 것이 여간 안쓰럽지 않다. 지부, 분회에서 이들에 대한 배려하기보다 ‘회장 선거’를 의식한 선출이었기에 더욱 그렇다.

    “한의계도 이제는 양적인 측면보다 질적으로 전환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는 안회장. 이를 위해서는 “무궁무진한 한의약의 장점을 살려갈 수 있도록 후진들의 연구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한 때”라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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