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에게 듣는다?-서관석 한의협 명예회장

기사입력 2004.03.26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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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관 문제는 잘 될 거라고 봐요. 시작이 반인 만큼 앞으로 약정한 회원들도 때가 되면 참여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걱정은 안해요.”

    한의협 명예회장이란 직함보다 한의사회관 건립위원장으로 더 친숙한 서관석 명예회장(31대 1997.8~1998.3)은 ‘내 생에 가장 기쁜 날을 꼽으라면 지난해 말 가진 기공식이었다’고 서슴없이 말한다.

    회관건립을 위해 동분서주한지도 어느 듯 10여년. 주변에서 ‘골치 아픈 일을 왜 맡느냐’는 주변의 충정어린(?) 말들도 있었지만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기회주의자가 싫어 ‘누군가 맡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더욱 열심히 했다.

    서 회장은 지난 94년 1월 집행부로부터 건추위원장을 맡아달라고 했을 때만 해도 거절했었다. 완강한 거절에 집행부도 다른 인사들을 물색하던 끝에 다시 권해오자 ‘팔자려니’하고 수락한 것이 지금까지 ‘직함’을 지녀왔다.

    서 회장과 협회 회관은 인연의 끈이 참 길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승환 회장 시절 여의도 땅 문제서부터, 78년 이금준 회장 재임시절 현 제기동 회관을 구입하기까지 관여하고 지켜본 증인이다.
    한의사 회원 2천명 시절. 을지로에서 매달 20만원의 월세를 시대를 청산하고 현 회관을 장만을 주도한 것도 서 회장이다. 돈이 없어 보험회사로부터 1천 몇 백 만원을 빌려 장만한 회관이지만 ‘월세 청산’이란 남다른 감회에 젖는다.

    “오승환 회장 시절이었을 겁니다. 137평의 여의도 땅을 구입했지만 아파트가 들어선다는 풍문에 급히 처분했죠. 하지만 우물쭈물 하는 사이 평당 10만원하던 땅값이 100만원으로 치솟는 등 천정부지로 올랐어요.”

    땅 판돈은 졸지에 전세방도 못구할 형편이 되자 ‘일을 벌이자’고 해 ‘사고’(?)를 친 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송장헌 회장 시절 공적패를 받기도 했다.
    서 회장은 내년 입주할 강서구한의사회관을 되돌아 보면 ‘땅에도 인연이 있다’는 옛 말을 실감한다.
    “건추위 위원장을 맡고 처음으로 구암공원 땅을 보러갔어요. 그 순간 ‘아 ! 이곳이 한의사회관 자리다’ 란 느낌이 들었어요.”
    3천평여평의 땅에 수의계약으로 회관을 짓는다면 생각만 해도 꿈만 같았다. 하지만 인연이 무르익지 않은 탓일까. 공교롭게도 당시 구암공원 부지는 인천시 소유였다. 강서구청의 허가를 얻는다 해도 불하를 받으려면 인천시 의회를 통과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게다가 당시 부천 공무원 세금 부정문제로 사회가 떠들썩한 시기여서 선 뜻 나서기가 어려웠다.

    그후 주변의 지인이나 회원들이 추천한 지역만도 올림픽공원, 석촌호수, 여의도, 광장동, 장안동 등 손에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았다. 하지만 강서구 구암공원이 눈에 밟혀 주변의 땅들은 사실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그러던 중 나타난 것이 상암동 마포부지였다. 당시 서울지역 땅값은 최소한 1000만원에서 1500만원까지 호가했지만 돈은 모자라는 형편에 처해있을 때 나온 마포부지는 필지마다 4백만원에서 8백만원에 거래됐다.
    강변북로 인접, 남향, 한강 전망, 국회 근거리, 서강대교 시공 등 조건들은 당시 건추위원들의 만장일치로 430평 구매를 결정했다.

    하지만 구매 당시 20평 정도가 도시계획에 포함될 것으로 알았던 부지가 설계를 끝내고 허가를 위해 구청을 들렀을 땐 대부분의 부지가 도시계획에 포함돼 건물을 올릴 수 없는 땅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땅을 구입하고 난 후 마포구에서 도시계획을 변경한 것이다. 회원들로부터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후 마포구와 서울시를 상대한 지리한 소송. 새옹지마 랄까. 상암동 경기장이 들어서면서 마포부지는 치솟는 지가 상승으로 큰 손해는 보지 않고 팔 수 있었다.

    “한의협 회장 시절 회관건립 문제와 함께 가장 큰 이슈는 역시 한약재 문제였어요.”

    서 회장 말처럼 한약재 기채문제는 한 마디로 ‘한의계의 뜨거운 감자’였다. 전임 회장이 불신임까지 불러왔던 한약재 기채문제는 임시 기채로 위기를 겨우 넘겼다. 당시 이계복 부회장을 비롯해 김우식 약무이사, 경은호 감사의 노력은 부채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 지금도 고마워한다.

    서 회장이 취임했던 해인 97년은 공교롭게도 대통령 선거로 나라 전체가 어수선한 정국이었다. 회장 취임 후 추스를 틈도 없이 한의계 의견을 대선공약 반영을 위해 서회장의 발길은 자연 바빠졌다.

    서울대 한의대 설치, 독립한의약법, 국립의료원 한방부 승격, 대통령 주치의 문제, 의료보험 확대 농어촌 공공의료 확대 등 숙원사업을 이루기 위해 각 당 정책실을 찾아다니며 설득하기에 바빴다.

    특히 한방정책실 설치에 따른 업무 분장은 가장 힘들었던 일중 하나로 기억된다. 한의약 관련 업무를 약정국과 의정국으로부터 이관받아야 함에도 이들의 거절해 복지부 내 투표까지 벌어지는 웃지 못할 상황까지 벌어진 것이다.

    결국 한방정책관실로 이관해야 된다는 결정은 내려졌지만 위기는 그 다음이었다.
    대선 후 폭풍이 그것이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밀어닥친 정부 조직개편이 한방정책관실 존폐로 파편이 튄 것이다. 겨우 업무를 이관해 오니 설상가상으로 존폐 위기란 벼랑 끝에 몰린 것이다.

    약정국, 의정국, 식품정책국을 폐지하면서 한방정책관실이 도마 위에 올랐다. 자칫 보건정책국 산하에 한방정책과로 전락, 탄생 1년만에 날개 한 번 펴지 못하고 없어질 위기였던 것이다.

    약사회와 의사회의 ‘한방정책관실 폐지’ 성명과 정치인들의 감언이설은 큰 압력이었다. 하지만 한방정책관실을 국으로 확대개편해 달라고 요청하는 오히려 역공을 하자 이들은 더 이상 말을 못하고 물러났던 일화는 지금 생각해도 서늘하다.

    “오늘날 한의약 육성법이나 대통령 주치의 문제 등은 한방정책관실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정책관실의 중요성을 알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달려들었던 거죠.”

    서 회장에게는 약대 6년제 문제는 국장을 제외하고 장차관선에서 추진하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장관으로부터 ‘약사회의 압력을 받았다’는 시인과 함께 대통령 공약사항에서 빼낸 것도 기억에 남는 일화 가운데 하나다.
    회장 취임 이후 몇 개월 동안 밤잠을 설쳐가며 뛰어다닌 결과 몸무게가 3~4Kg이나 빠져 중풍 조짐까지 보이는 등 건강은 엉망이었다. 회장을 한 번 더 하라는 주위의 권유를 뿌리친 것도 이 때문이다.

    “한의협이 지난날에 비해 위상이나 회원수, 인재 확보 측면에서 많은 발전을 했습니다. 한약 분쟁 이후 한의계 위상이 올라간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런 분쟁이 없으면 한방정책관실은 물론 한의학연구원은 기대할 수 없었겠죠.”

    하지만 그로서는 유능한 젊은 인재가 있어도 활용 못하면 의미가 없다고 본다. 우수한 인재들이 기초학을 꺼려하고 임상만 선호하는 풍토는 한의학 발전에서 가장 걱정되는 대목이다. 때문에 최근 한의계에 불고 있는 기초학 육성지원이 반갑고, 앞으로 동창회나 협회서도 기초한의학 지원에 더욱 나서야 할 것이라고 권한다.

    74년 성동구 한의사회장시절부터 시작한 골프로 건강을 다진다는 서 회장은 20년전 한의사 골프회 모임을 창단과 장광배 골프대회를 개최하는 등 매니아이기도 하다.

    “회원과 집행진은 수직관계가 아닌 수평관계입니다. 따라서 회원들이 피부로 느끼는 그 무엇을 해주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반면 회원들은 회비만 냈다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솔선수범하는 자세가 중요하죠.”

    자신을 위해 많은 돈을 쓰면서도 협회를 위해서는 아까워 하는 풍토가 안쓰럽다는 서 회장. “한의업으로 돈을 벌었으면 한의계 발전을 위해 쓸 줄도 아는 환경이 아쉽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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