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대 회장(1988.4~1989.12)을 역임했던 조용안 명예회장은 요즘 진료시간 틈틈이 45년 몸 담았던 한의계의 개인사를 정리하고 있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듯’ 지난 한의계를 돌아보면 우선 안스러움이 앞선다. 어느새 한의계 나이도 중년의 50 고개를 훌쩍 넘었지만 평탄치 않은 인생역정 만큼이나 신산을 함께 맛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환자도 많이 보고 사회활동도 많이 했지요. 한 때 정치에 뜻을 두고 지역사회에서 몸이 두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뛰어지만 쉽지 않네요.”
관악지구에서 주례 등 주민들의 대소사를 찾아다니며 활동한 30여년의 시간이 주마등 처럼 스쳐간다. 전두환 , 노태우 대통령 시절. 평통자문위원, 구정, 시정 등 왕성한 활동은 새마을 사업 지역발전 활성화 공로로 96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하는 영예도 누렸다.
“안영기 회장이 국회로 진출하면서 88년 4월 1일 취임했죠. 하지만 공교롭게도 취임한지 몇 일도 되지 않아 안마사 침구사용 문제가 불거져 10일 한의계 최초 전원총회를 개최해야 했습니다.”
흑석동 원불교 회관에서 전국서 2천여명의 회원들이 운집한 이날 총회는 결국 주동자들이 노량진경찰서로 끌려가는 등 수난을 겪는다.
무엇보다 당시 여론마저 나빴다. ‘맹인 안마사’ 동정론으로 인해 한의사들이 매도되었던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씁쓸하다. 불쌍한 맹인들이 생계를 위해 침을 놓겠다는 데 소위 대학 나온 의사란 사람들이 이들의 밥그릇을 빼앗으려 한다며 비난해온 것이다. 이같은 분위기에서는 한의계의 주장은 변명이나 구실에 지나지 않는 어처구니없는 사태로 돼 버렸다.
하지만 재임기간 중 나쁜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88올림픽에서 세계선수들을 치료하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올림픽 경기장 인근 학교를 통째로 빌려 침구실, 물리치료실 등 진료실이 개원되자 선수, 임원은 물론 대통령, IOC 총재, 외무부 장관이 다녀가는 등 대 성공이었다.
무엇보다 외국선수 850명에게 한국 한의학으로 치료했다는 사실도 말고도 국제적인 홍보효과로 한의학 외교의 전환기를 맞은 것이다. 매일 외부 인사 영접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신이 났다. 그 덕에 한의계 대표로 선수촌 전문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했다.
또 하나는 역대 한의계의 숙원이었던 한방군의관 18명의 배출을 흐뭇하게 지켜본 것이다. 군의관 750명의 한정된 티오로 의사들 마저 경쟁적인 판에 한방군의관은 엄두조차 못내는 상황. 하지만 한의계 끈질긴 티오 요구는 의사들의 반발은 불을 보듯 뻔했다.
조회장은 한의계 발을 들여 놓고 위험했던 고비가 수차례 겪었다. 78년 오승환 회장 당시 부회장으로 재직하던 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아찔하다.
한의원에서 환자진료를 보던 중 갑자기 대검 특수부에 끌려간 것이다. 혐의는 약사 한약조제 저지 등 의권사업 차원의 로비. 국회보사분과위원들과 술을 먹은 것이 화근이었다. 오승완 회장과 함께 죄인 취급받으며 연금된 상황. 9명으로 구성된 경제수사팀은 3륜차로 협회 모든 경리장부를 압수한 것은 물론이다.
협회가 문을 닫아야 한다는 중압감은 지금도 가슴을 눌러오며 몸서리쳐진다. 3일간 꼬박 뜬눈으로 조사를 받으며 자포자기 심정으로 모든 것을 책임지기로 결심한 순간, 우여곡절 끝에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또 약사 한약조제 저지와 침구사 문제로 인한 데모를 준비하다. 자신을 비롯한 오승완회장, 부산 정홍교 지부장 등 임원 30~40명이 찝차에 실려 구금받았던 기억도 한의계의 역사 만큼 가슴아팠다.
“의권사업은 지금도 어렵지만 당대에도 쉽지는 않았어요. 모든 게 세월 속에 묻혀가지만 그런 고난이 밑거름이 되어 한의약육성법이 제정되고 한의계가 이만큼 성장했다고 봐요.”
의권 문제로 매일 술 먹고 토하고, 또다시 술 먹기를 반복했던 시간들이 지금도 지방간으로 고생을 한다.
침구사 문제를 비롯해 약사법 등 의권과 간련해 회원들은 당대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과거사를 연속성을 통해 배울 것은 본받아야 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전임 회장단들의 경험과 지혜가 비록 현재는 고리타분하고 잔소리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의권 문제도 시대에 따라 방식은 틀리지만 지난 역사 안에 해답은 있다고 본다. 역사를 이어간다는 것. 그게 오늘 한의계의 존재 이유라는 조 회장은 ‘뿌리없는 나무는 없다’는 말로 압축한다.
현 협회장 등 집행진이 명예회장단에 참석해야 하는 당위성을 여기서 찾는다. 무엇보다 명예회장들이 아파하는 것은 존경심은 차치하더라도 한 때 마치 나이든 사람들이 무임승차한 것처럼 취급하는 후배들이 안쓰러울 따름이다.
재임 중 대한한의사협회 40년사 발간도 어쩌면 이같은 맥락이란 생각이 미친다. 앞으로 50년사, 100년사를 발간하기를 기원하며 제작한 40년사는 지하실에 곰팡이와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잠자고 있는 각종 사료들을 흔들어 깨워 생명력을 불어넣은 것이다.
한대희 편집위원장 등 5~6명으로 구성된 출판위는 먼지와 곰팡이로 인해 피부병을 앓아가며 예산도 없어 일일이 찾아 다니며 모금해 만들었지만 보람은 있었다. 40년사는 5천부가 발행돼 지금도 전국 대학도서관과 회원들의 곁에 숨쉬고 있는 것만으로 뿌듯하다.
조 회장은 예나 지금이나 한의계 발전 국가적 도움이나 관리 없이는 전략기간 산업으로 발전하지 못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사립에 의존하고 있는 한 한의학의 경쟁력은 고사하고 뒤쳐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에따라 서울 국립대 의사와 동등하거나 최소한 한 단계 높은 관심과 지원이 있어야만 한의계의 국가경쟁력은 갖춰질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한의사들의 국회진출로 정치적 역량도 갖춰야만 한다는 말에 힘을 준다. 국가사업으로의 가교역할은 누군가 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의계의 내적으로 강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금도 협회장이 누군지 모르고 있는 회원이 있는가 하면 국민들 조차 한의원을 한약방으로 인식되고 있는 상황에서 ‘미래’는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의권 사업도 중요하지만 후배가 선배를 존경하고, 선배가 후배를 아껴주는 공동체 형성 이 없으면 한의계의 미래도 없다고 봐요. 협회가 구심력을 가지고 갈 때 진정한 힘이 생겨납니다”
결국 회원들의 관심과 애정만이 한의학 발전을 담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조 회장. 큰 결실은 없었지만 후회 없이 살았다며 인사를 건네며 환자를 보러 진료실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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