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해(己亥)년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은?

기사입력 2019.01.02 11:25

SNS 공유하기

fa tw
  • ba
  • ka ks url
    기해예송·기해박해 등 크고 작은 재난과 사건



    [한의신문=윤영혜 기자]기해는 육십간지 중 36번째 해로, 서력 연도를 60으로 나눠 나머지가 39인 해가 ‘기해년’이다. 육십간지는 10간과 12지를 조합한 것으로 10간은 갑(甲), 을(乙), 병(丙), 정(丁), 무(戊), 기(己), 경(庚), 신(辛), 임(壬), 계(癸)로 이루어져있고, 12지는 자(子), 축(丑), 인(寅), 묘(卯), 진(辰), 사(巳), 오(午), 미(未), 신(申), 유(酉), 술(戌), 해(亥)로 구성된다. 특히, 12지는 십이지수(十二支獸)라고 불리며 동물과 결합되어 있다. 이들을 조합하면, 갑자, 을축, 병신 등의 단어들이 만들어진다.

    ‘기해’는 육십 간지의 36번째 단어로 10간의 ‘기(己)’와 12지의 ‘해(亥)’가 만나서 합쳐진 것이다. 기해년은 ‘기’는 황금을 뜻하고 ‘해’는 돼지를 뜻하기 때문에 황금 돼지의 해라고도 불린다. 60년마다 찾아오는 기해년, 과거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역사적 사건을 정리해 봤다.

    역사 속 기해년은 대체로 큰 기근이나 전쟁이 없는 평탄한 해를 보냈지만 크고 작은 재난과 사건은 있었다.

    1359년에는 홍건적이 고려에 침입한 사건이 발생했으며 동년에는 왜구까지 고려에 침략하는 외환(外患)이 발발했다.

    1419년 6월에는 조선 세종대왕이 장군 이종무를 파견하여 대마도를 정벌케 했다. 이른바 역사상 유명한 저 기해동정(己亥東征)이다다.

    1479년 기해년은 조선 왕실의 내부 갈등이 극심했던 해로 연산군의 생모 윤씨가 성종의 얼굴에 생채기를 낸 것을 계기로 폐서인 돼 사가로 쫓겨난다. 1599년 기해년은 1598년 임진왜란이 끝나고 평화를 맞았던 원년으로 서민들은 황금돼지해를 축복으로 여겼다.

    기해년에 일어난 대표적 역사적 사건으로는 1659년 예법을 놓고 대립한 기해예송을 꼽을 수 있다. 기해예송은 1659년(현종 즉위) 5월, 효종의 국상에 계모후였던 자의대비가 입을 상복의 종류를 두고 일어났던 서인과 남인의 예설 분쟁이다. 당시 서인들은 효종이 인조의 증자임을 앞세워 기년복을 주장했고 남인들은 효종이 왕위를 계승해 인조의 장자에 해당한다고 하여 삼년복을 주장했다.

    효종이 종법적(宗法的) 지위에 대한 학자들 간의 인식 차이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효종을 인조의 장자 혹은 차자로 볼 것인가에 따라 자의대비(慈懿大妃, 조대비)의 복이 결정되는 역사적 배경으로 발생한 사건이다.

    천주교 4대 탄압이라 불리는 1839년 기해박해도 역사적 사건이다. 최초의 천주교 박해사건인 신유박해를 일으킨 반천주교인인 정순왕후가 승하하자 당시 세도세력인 안동김씨 김조순을 비롯한 세도가들 중에 시파들이 많았다. 시파란 사도세자를 가여이 여기는 그룹이며 반대편인 벽파는 사도세자의 죽음이 당연하다고 본 그룹이다. 그리고 이들 중에는 천주교인이 많았다.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누그러지면서 로마 교황청은 조선에 천주교 조선대목구를 설정하여 독립 교구를 탄생시킨다. 그리고 서양인 천주교 신부인 피에르 모방, 자그 샤스탕, 로망마리조제프 앵베르 주교등이 조선에서 포교활동을 하게 된다. 이러면서 천주교 신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자 조선정부는 1839년 9월 21일 기해박해를 일으켜, 3인의 서양인 천주교 신부를 비롯한 119명의 천주교인이 투옥, 처형됐다.

    1899년 기해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개통되기도 했다. 같은해 조선왕실의 시조 묘역 조경단이 전주 건지산자락에 조성되기도 했다. 1899년 당시 독립신문에 발표된 조선 인구수는 1600만명이었다.

    1959년 9월 17일에는 민족 대명절 추석 당일, 경남 창원시를 비롯한 남해안 일대를 태풍 사라(Sarah)가 할퀴고 지나갔다.

    당시 사라의 최대 중심 풍속은 초속 85m, 평균 초속 45m, 최저 기압은 952hPa을 기록했는데, 이는 1904년 한반도에서 기상 관측이 시작된 이래 역대 3번째로 큰 인명 피해를 남겼고 종합적으로 비교해 볼 때 규모가 가장 큰 태풍으로 기록됐다.

    한국전쟁이 이후 전국이 폐허가 된 상황이라 이를 대처할만한 방재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엄청난 폭풍우를 동반한 태풍에 많은 사람이 삶의 기반과 터전을 빼앗겼다.

    뉴스

    backward top 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