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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9월 21일 (월)

낯선 땅에서 마주한 통증의 얼굴들

낯선 땅에서 마주한 통증의 얼굴들

김세진 한의사(경희대학교한방병원 침구과 전문수련의)
KOMSTA 제186차 라오스 의료봉사를 다녀와서 <2>


186 김세진기고2.png


[한의신문] 낯선 라오스어로 첫 인사를 건네며 진료실 문을 열었던 날이 떠오른다.

 

짧은 봉사 일정을 마치고 돌아왔지만, 현장에서 마주했던 수많은 환자들의 눈빛과 온기는 떠올릴수록 더 그리워지는 기억이다.

 

봉사 기간 동안 총 1,399명의 환자분들이 진료소를 찾았고, 저는 그중 286명의 환자를 직접 만나며 그들의 아픔을 듣고 한의진료를 했다.

 

이번 봉사는 저에게 단순히 의료를 베푸는 시간을 넘어, 한의사로서 환자를 대하는 자세와 진정한 치료의 의미를 다시금 고민하게 해준 소중한 경험이었다.

 

먼 곳에서 찾아온 환자들, 진료실에서 마주한 현실

 

진료소로 향하는 길은 생각보다 훨씬 더 먼 곳에서 온 이들의 간절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비엔티안 현지 주민들뿐만 아니라, 저 멀리 방비엥에서 기차를 타고 달려온 분들, 심지어 태국에서 국경을 넘어 찾아온 분들도 계셨다.

 

각자의 사연을 안고 내원한 환자들의 질환군은 한국에서 접하던 패턴과 조금 달랐다.

 

추간판탈출증이나 퇴행성 관절염, 협착증 같은 근골격계 질환도 당연히 많았지만, 지간근이 굳어 손 전체가 뻐근하게 아프다고 호소하는 시장의 할머니들, 뇌졸중이나 파킨슨병 같은 신경계 질환 환자들도 유독 많았다.

 

특히 뇌졸중 환자 한 분의 이야기가 잊혀지지 않는다.

 

어느 날 갑자기 몸 한쪽이 마비되었지만, 당장 하루를 살아내기 위해 일을 멈출 수 없어 제대로 된 검사나 치료 없이 5년을 버텨왔다는 분이었다.

 

"5년이나 지났는데 왜 아직도 나아지지 않나요?"라고 묻는 그분의 눈빛 앞에서 저는 깊은 먹먹함을 느꼈다.

 

한국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뇌졸중 원인 평가(Stroke source work-up)나 예방을 위한 약물 복용, 체계적인 재활 치료의 기회조차 그들에겐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의료의 빈자리에서 마주한 환자들의 삶

 

발달 지연과 자폐증을 앓고 있는 어린 아기를 안고 찾아온 부모를 만났을 때는 속상한 마음에 "왜 이렇게 될 때까지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두셨냐"며 다그치듯 묻기도 했다.

 

하지만 진료를 이어가며 이내 제 생각이 짧았음을 깨달았다.

 

그들에게는 하루하루 삶을 살아내는 것 자체가 이미 버거운 투쟁이었고, 병원에 가는 것보다 그저 살아가는 것이 더 우선이었을지도 모른다. 환자의 처지를 깊이 헤아리지 못하고 조급했던 저 자신을 돌아보며 나지막이 미안한 마음을 삼켰다.

 

한 편으로는 엑스레이나 MRI 필름을 소중하게 봉투에 넣어 들고 다니면서도, 정작 자신의 병명이 무엇인지, 왜 아픈지조차 전혀 듣지 못해 답답해하는 환자들이 많았다.

 

그들이 가져온 필름을 하나씩 햇빛에 비춰보며 한국어학과 통역사를 통해 차근차근 설명해 드렸다.

 

"척추가 탑처럼 차곡차곡 쌓여있고, 그 사이에 디스크라는 쿠션이 있는데 그것이 눌려서 다리가 저린 것입니다"

 

언어의 장벽이 있었기에 오히려 쉽고 직관적인 표현을 고민하게 되었고, 내 몸의 상태를 드디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밝아지는 환자들의 표정에서 깊은 보람을 느꼈다.

 

느린 진료 속에서 다시 배운 한의사의 역할

 

현장의 여건상 진단 기기는 없었지만, 그것은 도리어 한의학의 기본인 망문문절(望聞問切)에 집중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질의응답 하나를 주고받는 데 통역을 거치며 두세 배의 시간이 걸렸고, 때로는 질문과 다른 답이 돌아와 답답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느린 기다림의 시간 동안 저는 환자의 얼굴빛을 유심히 살피고, 맥을 잡고, 혀의 상태를 보고, 체형과 걸음걸이를 관찰했다.

 

때로는 청진기를 대고 진찰하며 환자의 몸이 보내는 소리에 더 귀를 기울였다.

 

치료 반응은 정직했다. 허리가 덜 아파서 오늘은 걸어왔다는 할머니, 운전할 때 어깨가 아프지 않다는 아저씨부터, 어제보다는 입꼬리가 조금 더 올라간다는 벨마비 환자분까지, 양손을 맞대며 연신 "콥짜이(고맙습니다)"를 외치던 환자분들이 떠오른다.

 

침 치료와 함께 증상에 맞춰 처방해 드린 귀비탕을 복용하고 "처음으로 밤에 잠을 편안하게 잤다"며 환하게 웃으시던 환자분, 보중익기탕을 드시고 "입맛이 돌아 밥을 한 숟가락 더 먹을 수 있게 되었다"고 고마워하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은 진료실에서의 피로를 씻은 듯 날려주었다.

 

현지의 물리치료사들과 의사들 역시 한의학적 치료에 큰 관심을 보였다.

 

제가 놓는 침 자리나 부항 치료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고 사진을 찍어가는가 하면, 왜 이곳을 치료하는지 열정적으로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단기 봉사의 특성상 침 치료 한 두 번만으로는 만성 질환을 완전히 뿌리 뽑기 어렵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치료 효과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 유지할 수 있도록 '생활 속 자가 관리'에 공을 들였다.

 

한국에서 챙겨간 필라테스 밴드를 활용해 진료 보조 선생님들과 함께 치료가 끝난 환자들에게 스트레칭과 운동법을 하나하나 가르쳐 드렸다.

 

벽면에 붙여둔 라오스어 운동 포스터는 어느새 현지 주민들이 줄을 서서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가는 진료소 최고의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스스로 건강을 돌볼 수 있는 자그마한 씨앗을 심어주고 온 것 같아 마음이 뿌듯했다.

 


186 김세진기고1.png

 

마음을 나눈 의료봉사, 지속가능한 연대를 꿈꾸며

 

모든 일정을 마치고 진료소 문을 나설 때, "콥짜이(고맙습니다)"라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히던 환자들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며칠만 더 머물렀다면 이분들의 통증을 조금 더 덜어드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마지막 날 단장님께서 말씀해주신 "마음을 전하는 것이 봉사의 본질"이라는 구절을 다시금 되새겨본다.

 

의료봉사는 단순히 약을 주고 침을 놓아주는 일방적인 도움이 아니라, 서로의 체온과 마음을 주고받는 따뜻한 교감이라는 것을 깊이 배웠다.

 

라오스에 두고 온 마음의 온기가 쉽게 식지 않기를, 그리고 이 작은 동행이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지 않고 더 길고 지속가능한 연대로 이어지기를 소망한다.

 

짧았지만 강렬했던 라오스에서의 날들은 앞으로 제가 한의사로서 걸어갈 길에 오래도록 따뜻한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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