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일교수의 儒醫列傳 91

기사입력 2008.01.18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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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佛法으로 백성들의 고통과 함께한 儒醫

    학문을 하는 자로서 백성들에게 직접 시혜를 베푸는데 있어서 의학만큼 확실한 것도 없다. 고려 후기에 살았던 蔡洪哲은 의학으로 백성들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 실천궁행한 지식인의 표상이다. 蔡洪哲의 미담은 그의 묘비에 기록되어 있는 蔡洪哲墓誌銘을 통해 밝혀지고 있다.

    ‘蔡洪哲墓誌銘’은 1340년 蔡洪哲의 사후에 이곡(李穀)이 지은 것으로 실물은 현재 남아있지 않고, 李穀의 문집인 ‘稼亭集’ 권11과 조선 초 徐居正(1422~1492)의 ‘東文選’ 권124에 실려 있다. 이 묘지명을 통해 채홍철의 생애와 학술사상 그리고 의료활동에 대한 정보를 수집할 수 있다.

    동 묘지명에 따르면 蔡洪哲의 字는 無悶으로, 交州道 平康縣 사람이었다. 나이 18세에 成均試에 합격하고 23세에 진사로 합격하여 膺善府錄事에 임명되었고, 여러 관직을 거친 후에 通禮門祗侯가 되었다가 長興府使가 되어 어진 정치를 하였다. 부사를 그만둔 후에는 14년간 집에서 머물면서 스스로 中菴居士라 부르면서 불교와 의학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자신의 집 북쪽에 ‘전단원’을 지어 禪僧이 기거하게 하였고, 또한 ‘전단원’에 活人堂이라는 의료기관을 짓고, 백성들의 무료진료에 힘썼다.

    佛法으로 무장한 그는 大慈惻隱之心을 크게 발휘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벗어나게 하고자 하는 노력한 것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러한 蔡洪哲의 인품에 감동하여 훌륭한 군자로 여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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