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斥和를 주장하며 청나라에 굴복하지 않은 儒醫
충절과 절의로 뭉친 蔡得沂는 조선 중기 儒醫들 가운데 빛나는 인물이다. 특별히 鍼灸에 뛰어나 鍼醫로 묘사되기도 한 그는 인조년간에 여러 차례 인조의 질환에 대해 뛰어난 진단과 치료로 상을 받고 관직이 상승하기도 하였다. 제자백가에 달통하고 의방, 복서, 천문, 지리, 음율, 병서 등에 조예가 깊었던 채득기는 당대 최고의 학자로서 청나라와의 전쟁을 전후하면서 파란만장한 인생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남한산성이 함락되자 비분강개하여 華山 仙遊洞에 들어갔다가 다시 尙州의 無知山에 들어가 두문불출하고 독서에만 전심하였다. 후에 鳳林大君 등이 심양에 볼모로 가게 되자 인조가 그를 往護로 불렀으나, 병을 핑계로 불응하여 3년 동안 보은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다시 인조의 권유에 의하여 심양에서 대군들을 잘 받들었다.
蔡得沂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醫書로 ‘四醫經驗方’, ‘三意一驗方’이 있다. ‘三意一驗方’은 蔡得沂와 李碩幹, 朴濂 세명의 의사의 경험방을 후세 醫家가 편집한 서적이다. ‘四醫經驗方’은 안상우에 의하면(안상우, ‘[고의서산책194] 醫方合編’), ‘三意一驗方’에 許任의 경험방을 첨가하고 이를 증보한 서적이다. 이러한 醫書들에 蔡得沂의 경험방들이 비중있게 들어가 있는 것은 조선 후기에 의술로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蔡得沂는 1644년 봉림대군이 볼모에서 풀려나 瀋陽에서 함께 귀국한 후에 여러 차례 관직을 권유받았지만, 일체의 관직을 사양하고 낙동강 유역의 玉柱峯 아래에 은거하며 지냈다. 1798년(정조 22) 집의에 추증되었고, 상주 尙義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