醫史學으로 읽는 近現代 韓醫學 (571)

기사입력 2026.09.07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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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약분쟁에 의해 입증된 시민사회의 갈등 조정 능력
    “경실련의 갈등 조정과정을 바라본다면…”

    김남일.jpg

    김남일 교수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


     

    1993년 벽두를 뒤흔들었던 한약분쟁은 단순한 직역 간의 이해 다툼이 아니었다. 이는 해방 직후인 1953년 약사법 제정 당시 일제강점기 한약종상을 구제하기 위해 덧붙였던 모호한 법 조항 이래, 수십 년간 누적되어 온 한의약 법규의 구조적 모순이 민주화라는 시대적 격변 속에서 일거에 분출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1980년 약사의 한약 임의조제를 억제하고자 신설되었던 약사법 시행규칙 제11조 제1항 제7호의 ‘재래식 한약장’ 조항을 1993년 3월 보건사회부가 일방적으로 삭제·공포하면서 갈등은 걷잡을 수 없이 타올랐다.


    한의계는 이를 약사의 한약 취급을 전면 공인하는 개악으로 규정하며 면허증 반납 결의로 배수진을 쳤고, 전국 한의과대학생 3000여 명은 수업 거부에 돌입하며 대규모 집단 유급의 기로에 섰다. 


    당시 KBS 〈여의도 법정〉을 비롯한 여론조사에서 국민 대다수가 한약은 한의학적 진단과 방제 이론에 따라 다루어져야 한다는 한의계의 입장을 압도적으로 지지했음에도, 정부는 자의적 법 해석과 정책 번복을 거듭하며 중재자로서의 권위와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권위주의 시대에 미봉책으로 덮어두었던 보건의료 모순이 폭발하면서 관료조직의 신뢰가 붕괴된 이른바 국가 기능의 공동화(空洞化) 현상이었다.


    보건의료 인력 수급의 파국이 눈앞에 닥치고 국가 행정이 마비되었을 때, 이 첨예한 갈등의 엉킨 실타래를 풀기 위해 나선 주체는 바로 시민단체인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이었다. 경실련은 1993년 6월16일 공청회를 열어 파국의 위기에 처한 한의대생 유급 사태 해결을 위한 공론의 장을 마련하였고, 마침내 9월20일 역사적인 중재 합의안을 이끌어냈다.


    경실련 중재안은 3년 이내 한방 의약분업 원칙 명시, 약대 내 한약학과 설치를 통한 독립적 한약사제도 신설, 그리고 기존 약사에 대한 한약조제시험을 통한 한시적 기득권 인정 등을 골자로 하였다. 비록 합의 이후에도 직역 간 반발과 약국 휴업 등 극심한 진통이 뒤따랐으나, 정부와 국회는 경실련 안을 전폭 수용하여 1994년 1월7일 약사법 개정을 단행했다. 이는 국가 관료제가 신뢰를 잃고 당사자 간 대화가 단절된 극한의 교착 상태에서, 공익적 시민사회가 쌓아 올린 ‘사회자본’을 통해 비영합 게임(Non-zero-sum Game)의 상생 타협안을 도출해낸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경실련의 중재로 매듭지어진 약사법 개정은 이후 대한민국 한의약 제도의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경희대와 원광대, 우석대에 한약학과가 신설되어 정규 학부 과정을 거친 전문 한약사 배출 체계가 확립되었다. 또한 한의약의 표준화와 과학화를 전담할 국책 연구기관으로 한국한의학연구원(KIOM)이 설립되었으며, 보건복지부 내에 국장급 한방정책관(현 한의약정책관)이 신설되어 한의약 행정의 독립적 토대가 마련되었다. 나아가 공중보건한의사 제도의 정착과 한의약육성법 제정으로 이어지며 한의약은 비로소 공공의료와 국가 정책의 중심부로 도약하게 되었다.


     

    의사학(醫史學)적 맥락에서 1993년 한약분쟁과 경실련의 중재 과정은 일제강점기 이래 지속된 왜곡된 법체계를 바로잡고 한의약의 학문적 독자성을 제도화한 결정적 분수령이었다. 아울러 민주화 이행기 속에서 발생한 가장 첨예한 사회적 갈등을 관료적 통제가 아닌 시민사회의 자율적 조정 역량과 사회자본의 힘으로 극복해 낸 값진 역사적 성취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김남일.jpg
    1993년 9월20일 경실련 합의안 발표 기자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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