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차원 인재·재원 투자와 표준외교 강화로 글로벌 리더십 키워야
이유정 한국한의학연구원 국제표준기획팀장
이유정 한국한의학연구원 국제표준기획팀장
글로벌 헬스케어 시장에서 국제표준은 단순한 기술 가이드라인을 넘어, 국가 간 무역 장벽을 결정하는 보이지 않는 무기이자 패권의 척도다.
세계 전통의약 시장이 연평균 8.2%씩 고속 성장해 2027년 7682억 달러 규모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지난 2026년 6월 첫째 주에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국제표준화기구 전통의학 기술위원회(ISO/TC 249/SC 1) 총회는 전 세계 전통의학의 치열한 글로벌 패권 경쟁의 현실을 다시 한 번 고스란히 드러냈다.
숫자로 드러난 한·중 표준 경쟁
‘80 vs 10’. 이 숫자는 중국 단독개발 국제표준 숫자 대 한국 단독개발 국제표준 숫자다(공동참여표준 제외). ‘75 vs 12’. 이 숫자는 ‘26년도 ISO/TC 249/SC 1/WG 1(국제표준화기구 전통의학기술위원회 한약작업반)’ 회의에 참여한 중국전문가 대 한국전문가 숫자다.
숫자로 확인돼 듯이 중국과 한국의 전통의학분야 국제표준을 지원하는 재원과 인력에서 큰 차이를 알 수 있다. 중국은 ‘중국표준 2035’와 ‘중의약 표준화 행동계획(2024-2026)’을 앞세워 국가 주도로 세계 표준 시장을 맹렬히 장악해 가고 있으며, 최근에는 인공지능(AI)과 디지털 기술까지 자국 표준 체계에 전면 도입하며 고도화를 꾀하고 있다. 이번 도쿄 총회는 한국, 중국, 일본 등 19개국에서 160여 명의 전문가가 온·오프라인으로 참여해 전통의학 분야 국제표준화 현안을 두고 팽팽한 신경전을 벌였다.
한국, 국제표준 5건 진전…표준 경쟁 존재감 입증
한국은 국제표준 경쟁에서 결코 무력한 조연에 머물지 않고, 이번 2026 도쿄 총회에서 중국의 독주를 저지하는 강력한 견제 장치이자 글로벌 표준의 핵심 주축으로서의 저력을 유감없이 입증했다. 한국한의학연구원 국제표준기획팀을 필두로 한 우리 대표단은 한국이 참여해 개발 중인 국제표준 5건의 차기 단계 진입을 확정 짓는 쾌거를 거뒀다.
구체적으로 과학적 한약재 품질관리를 위한 △‘DNA 바코드를 이용한 한약의 유전자 분석 일반요건’이 작업초안(WD, 2단계)에 진입했다. 전통 임상 기술의 현대화를 대변하는 △‘일회용 도침’ △‘설진기 시험방법’은 위원회 단계(CD, 3단계)로 올라섰다.
한의약 첨단 디지털 헬스케어의 핵심 개념을 담고 있는 △‘경혈 전자약’은 기술보고서 질의(DTR, 4단계), △‘진단정보를 위한 임상지식구조-맥’은 국제표준안 질의(DIS, 4단계) 단계에 진입하며 국내 한의약 기술과 연구 성과가 세계 시장의 표준으로 안착할 수 있는 든든한 발판을 다졌다.
뿐만 아니라 중국이 제안한 행인, 고삼, 노회 등 3건의 신규 한약재 품질 규격 표준안에 대해서도 한국이 공동 프로젝트 리더(co-Project Leader)를 수임하는 실리를 챙겼다. 이를 통해 국내 유통과 활용 비중이 높은 핵심 한약재의 품질·안전성 기준 제정 과정에 직접 참여해 국내 산업계의 의견을 반영하고 한약재의 국제적 신뢰도를 우리가 주도해 끌어올릴 수 있는 기반을 확보했다.
특히 이번 총회의 최대의 쟁점은 국제표준 문서 내 ‘한자(간체 및 병음 포함) 표기 안건’이었다. 중국은 캐나다, 네덜란드 등 친중 국가들과 함께 한의학 고유 개념의 영어 표현 한계를 명분으로 한자 표기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하며 국제표준 문서 내 한자 사용을 제도적으로 못 박으려 시도했다.
이에 한국 전문가들은 일본, 호주와 함께 ISO의 공식 언어(영어·프랑스어·러시아어) 작성 원칙 준수를 강조하고, 특정 언어의 문자사용이 국제표준의 보편적 이해와 회원국 간 일관된 적용을 심각하게 저해한다는 논리로 전면 저지해 최종 안건 보류를 끌어냈다. 이는 사전 회의 등을 통해 철저하게 준비된 한국대표단의 표준 외교력이 빛을 발한 순간이자, 향후 ISO 기술관리이사회(TPM)의 절차 검토 과정에서도 우리가 지속적으로 목소리를 높여야 할 핵심 분수령이 됐다.
한의약 국제표준 리더십 강화…국가 지원·디지털 표준·외교가 열쇠
이처럼 정교해지는 주변국들의 표준 다극화 정세 속에서, 대한민국 한의학이 지속 가능한 글로벌 리더십을 공고히 하기 위한 과제는 명확하다.
첫째, 현장의 사명감에 의존하는 구조를 깨고 국가 차원의 전폭적이고 상설화된 재원·인력 지원 체계를 시급히 구축해야 한다. 일본이 젊은 표준 전문가 확보를 위해 총회 현장에서 홍보영상을 촬영하고 일본동양의학회의(JLOM)를 가동하고 중국이 특유의 도제시스템을 표준 전문가 육성에 도입해 후임까지 회의에 참석시키는 것과 같이, 우리도 장기적인 인력 격차를 극복할 조직적 육성이 필요하다. 정부는 한의약 표준화를 국가 전략 과제로 격상하고 ‘글로벌 표준 인력 양성 프로그램’을 신설해 법률, 어학, 첨단 기술 역량을 갖춘 신진 한의학 표준 전문가를 키워내야 한다.
둘째, 우리가 이미 확보한 의료기기(WG4)와 용어(WG5) 분야의 의장국 지위를 적극 활용해 고부가가치 ‘융합형 기술 표준’을 선점해야 한다. 한약재 원료 중심의 표준은 중국의 규모를 이기기 어려우나 이번에 차기 단계 진입에 성공한 경혈 전자약, 설진기, 진단정보 임상지식구조(맥)처럼 한국이 강점을 가진 디지털 헬스케어와 첨단 의료기기 표준 분야는 중국의 거센 표준선점 전략을 넘을 수 있는 한국형 표준의 독창적 무기가 될 것이다.
셋째, 국제표준 무대에서 한국의 의견을 지지해주고 투표에 찬성 의견을 던져줄 우호국 확보에 표준 외교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국제표준은 36개월에 걸쳐 6단계의 투표를 통과해야 제정되는 매우 까다롭고 긴 여정이다. 따라서 한국이 제안한 국제표준을 지지해 줄 우호국 확보를 위한 전략과 자원이 필요하다.
한국형 표준외교 강화해 전통의학 글로벌 리더십 확립해야
전 국민 건강보험 임상 데이터와 현대화된 3차 의료 인프라를 갖춘 한국의 한의학은 과학적 검증과 안전성 면에서 글로벌 표준의 조율자(Coordinator)로 나설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췄다. 독일, 호주 등 표준의 중립성을 원하는 국가들과의 연대하고, 새롭게 전통의학 국제표준 무대에 등장한 인도와 몽골 등과도 우호관계를 맺어간다면, 다자간 무대에서 우리의 표준안을 관철하기가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국제표준은 한 번 제정되면 미래 글로벌 시장에서 우리 산업의 손발을 묶어버리는 장벽이 된다. 2026 도쿄 총회에서 증명된 우리 전문가들의 헌신적인 리더십 위에 보다 체계적인 인적·물적 지원이라는 날개를 달아준다면, 대한민국의 한의학은 중국의 독주를 막아내고 세계 전통의학 표준 무대에서 강력한 핵심 리더이자 글로벌 스탠다드의 명실상부한 중심 기둥으로 확고히 자리 잡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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