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종욱 교수, ‘조선의학 사유의 구조화’ 주제 발표 통해 조선의학의 가치 재조명
[한의신문]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소장 신동원·KRISTaC)와 중국과학원 자연과학사연구소(소장 관샤오우·IHNS)는 8일부터 9일까지 이틀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제2회 KRISTaC–IHNS 공동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한국연구재단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후원 및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호스트 기관으로 참여해 진행된 이번 대회는 두 연구소가 2019년 학술교류 협정을 체결한 이후 양국을 번갈아 가며 2년 주기로 정례적으로 개최되는 학술행사로, 2024년 베이징에서 제1회 대회가 열린 바 있다.
한·중 양국을 대표하는 과학기술·문명사 연구 거점으로 평가되는 두 기관은 실제 IHNS의 경우 중국과학원(CAS) 산하 자연과학사 연구의 본산으로, 중국 과학기술사 연구의 표준을 정립해 온 국가 대표 연구기관이다. 또한 KRISTaC은 그동안 ‘한국의 과학과 문명’ 총서 시리즈를 30여 권 출간하며 한국 과학문명사 연구를 국제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거점 연구소다.
특히 양 기관의 첫 만남은 ‘한국의 과학과 문명’ 총서 발간 후 결과물을 공유한 것이 계기가 됐으며, 이후 대등한 파트너로 정례 학술 교류를 이어오면서 한국이 동아시아 과학기술·의학사 연구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이번 대회에는 양국에서 12명의 전문가가 발표자로 참여, △지식과 실천의 이동 △전통과 해석 △인간과 환경 등 세 개의 세션으로 나눠 진행하는 한편 종합토론에선 양국의 과학사 연구가 많은 접점을 공유하고 있음을 확인했으며, 향후 양 기관의 더욱 긴밀한 협력으로 데이터 공유, 공동연구 프로젝트 추진, 인력 교류 등을 지속 추진하고, 나아가 인문학적 통찰과 첨단 기술이 결합된 동아시아 과학문명 연구의 새 지평을 열어 가기로 했다.
조선의학 문헌, 판단의 구조 차원에서 실증
특히 ‘전통과 해석’ 세션에서 전종욱 KRISTaC 교수는 ‘조선의학 사유의 구조화: 인지 단위로서의 병문과 연구데이터로의 전환’을 주제로 한 발표를 통해 조선의학 인식 구조는 판단 중심 AI 시대의 핵심 자산이라고 강조해 큰 관심을 끌었다.
지난 1월 전 교수는 “200년 전 서유구가 4799개 처방을 106개 운자(韻字)에 따라 ‘탕액운휘(湯液韻彙)’로 정리한 데이터에서 보듯, 조선의학 문헌 자체가 이미 AI가 학습하기 좋은 구조화된 데이터의 원형을 갖고 있다”는 가설을 제시한 바 있으며, 이날 발표에서는 그 가설을 처방 색인의 차원을 넘어 ‘판단의 구조’ 차원에서 실증해 보이는 자리가 됐다.
전 교수는 “조선의학 문헌에서 우리는 보통 ‘병명·처방·증상’만 추출해 왔다”고 지적하며, “정작 놓치고 있는 것은 △인식의 순서 △원인의 배열 △개입의 타이밍 △절제의 논리이며, 이 네 가지가 사실상 조선의학 지식의 코어”라고 진단했다. 즉 병문(病門)은 단순히 질병 분류명이 아니라, 인식·판단·개입의 알고리즘을 압축적으로 담은 ‘인지 단위(cognitive unit)’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방유취·동의보감·인제지에 ‘역시만필’ 더한 ‘3+1축’ 제시
전 교수는 이번 발표에서 분석 축을 △의방유취 △동의보감 △인제지 등 종합 문헌 3축에 18세기 이수귀의 임상실록 ‘역시만필(歷試漫筆)’을 추가한 ‘3+1축’으로 확장했다. 그는 “‘역시만필’은 노비부터 고관까지 130여 임상 장면을 담은, 동의보감 전통 위에 서 있는 실제 임상 기록”이라며 “종합 문헌의 판단 구조와 실제 임상 경험이 어떻게 만나는지를 추적할 수 있는 결정적 자료가 새로 더해진 셈”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지금까지의 조선의학 디지털화 작업은 대부분 ‘처방-증상-약재’ 관계망의 통계적 추적에 머물러 있었다고 지적한 전 교수는 이같은 단계를 넘어선 ‘판단 구조 RDM(Judgment Structure RDM)’을 제시해 눈길을 끌었다.
판단 구조 RDM의 핵심은 3계층 스키마로, △L1 인식(現象認識): 증상·환경·계절·내력 등 진입 단계 △L2 판단(判斷構造): 원인 배열, 아형 감별, 전변, 예후 등 해석의 중심축 △L3 실행(治療實行): 처방뿐 아니라 금기·유보·타이밍 조율까지 포함된 행위 단계로 나뉜다.
전 교수는 “이 단순한 분리가 결정적”이라며 “종래 평면적으로 나열되던 증상·해석·치료를 별개의 층위로 분리해 두면 텍스트에 묻혀 있던 ‘판단의 경로’가 비로소 검증 가능한 형태로 드러나며, 다른 분야 지식 체계와의 호환성도 확보된다”고 밝혔다.
30병문이 보여주는 사유 패턴: 해수·소갈·습병
전 교수는 30병문 중 세 가지를 사례로 들어, 같은 형식의 RDM이 사실은 서로 다른 사유 경로를 담고 있음을 보여줬다.
즉 ‘해수(咳嗽)’는 풍한·풍열·조사·한음·내상·식적 등 6가지 원인이 폐에 어떻게 침입·잠복·울체되는지를 추적하는 ‘경계–침투’ 구조이고, ‘소갈(消渴)’은 음식·정서·체질이 어떤 순서로 누적되어 소모를 부르는지를 다루는 ‘고갈–순서’ 구조이며, ‘습병(濕病)’은 외습과 내생습이 기후·지형·수질·토질과 인체에 어떻게 분포·정체되는지를 보여주는 ‘생태–지형’ 구조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같은 그릇(RDM)에 담겨 상호 작용이 가능하지만, 그 안에 흐르는 사유 패턴은 또한 각 병문마다 고유성을 띠고 있다는 것이 핵심이라는 설명이다.
아울러 30병문을 가로질러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두 가지 특징을 △원인배열의학(原因配列醫學) △개입타이밍 조율의학(介入時點調律醫學)으로 제시한 전 교수는 “조선의학은 복합 원인을 단순히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규칙으로 ‘배열’하고 있으며, 침입 및 고갈의 순서·환경적 배치 등 시퀀스 자체가 진단의 핵심을 이룬다”며 “또한 원인의 배열은 ‘언제 개입할 것인가’와 긴밀히 연결, 같은 처방도 시점에 따라 약이 되기도 독이 되기도 하는 등 적극적인 임상 지능으로 격상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 두 가지를 함께 두고 보면, 조선의학은 처방의 의학이 아니라 판단의 의학이라는 점이 분명해진다”면서 “이것이 AI 시대에 조선의학 사유 구조가 가지는 귀중한 가치”라고 강조했다.
RDM→지식 그래프→판단형 에이전트 AI로의 진화
이와 함께 전 교수는 ‘30병문 RDM’이 국가 연구데이터 플랫폼 DataON에 정식 승인된 상황에서 향후 전체 연구 로드맵을 제시했다.
전 교수가 그리는 ‘AI와 함께하는 한의학’의 구도는 단계적으로, 3+1축 문헌 속 문장이 RDM의 판단 단위로 구조화되고, 증상·판단·행위·금기·전거가 노드로 연결된 ‘지식 그래프’가 생성되며, 그 위에 텍스트 근거를 보존하는 검색증강생성(RAG) 시스템이 얹히는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인식·판단·절제·증거를 반드시 통과해야 답하는 에이전트 AI’가 작동하는 구조다.
그는 “오늘날 대형 언어모델(LLM)은 빠르게 답을 내는 데 최적화돼 있지만, ‘답하지 않을 줄 아는 능력’은 매우 취약하다”면서 “조선의학의 판단 구조는 성급한 답을 내려고 환각(hallucination)을 일으키기 쉬운 현재의 AI에 대해 강력한 보완 모델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특히 전 교수는 글로벌 빅테크의 LLM이 의료 데이터를 빠르게 흡수해 가는 상황에서 한국이 독자적인 AI 생태계를 갖추려면 ‘대체 불가능한 한국 고유의 데이터 자산’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전 교수는 “3+1축 문헌은 동아시아 한의문명권 전체를 아우르는 종합자료이자, 현대 의학 데이터에도 결여된 ‘판단의 데이터(곧 meta-data)’를 풍부히 담고 있다”며 “한국형 소버린 AI는 토종 LLM을 만든다는 의미가 아니라, 빅테크가 만들기 어려운 깊이 있는 ‘판단의 데이터’를 우리가 먼저 구조화하고 표준화해 두는 것, 그것이 진짜 의미의 데이터 주권”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한편 이날 발표된 전종욱 교수의 연구 내용을 담은 논문은 ‘한국디지털인문학회지’ 5월호에 게재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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