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인문학의 방법론으로 한의학의 관계망을 조망하다”
김남일 교수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
필자가 근현대 한국 한의학의 발자취를 추적하며 사료의 바다를 헤엄쳐온 지도 어느덧 삼십 년이 흘렀다. 그간 수많은 논문과 잡지, 빛바랜 기록 속에서 우리 한의학이 겪어온 인물들의 고뇌와 사건의 파장, 그리고 치열했던 학술적 논쟁의 흔적들을 길어 올렸다. 그러나 이제 한의학사 연구는 단순히 문헌을 읽고 해석하는 전통적인 실증주의의 틀을 넘어, 인공지능(AI)과 디지털 인문학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마주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도구의 변화가 아니라, 우리 역사를 바라보는 ‘안목’의 확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적인 연구 방식에서는 특정 인물이나 사건을 개별적으로 조명하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근현대 한의학사는 일제강점기의 탄압과 저항, 광복 이후의 제도적 갈등, 그리고 현대적 임상 체계의 수립까지 복잡한 그물망처럼 얽혀 있다. 여기서 디지털 인문학의 네트워크 분석(Network Analysis) 방법론은 이러한 복잡성을 시각화하여 숨겨진 맥락을 드러내는 데 탁월한 효용을 발휘다.
예를 들어, 『동의보감』의 정통성을 수호하려는 흐름과 사상의학 혹은 팔체질의학 같은 새로운 체질론적 학풍이 어떻게 교차하고 대립했는지를 인물 간의 인용 관계, 서신 왕래, 학회 활동 데이터를 통해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특정 시기의 학술적 논쟁이 단순한 개인의 의견 차이가 아니라, 당시 사회문화적 역학 관계 속에서 형성된 거대한 ‘지식의 지형도’였음을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근현대 한의학의 방대한 학술 잡지와 신문 기사, 그리고 선배 제현들이 남긴 수많은 학위 논문들은 그 자체로 거대한 빅데이터다. 인공지능의 텍스트 마이닝(Text Mining)과 토픽 모델링(Topic Modeling) 기법은 연구자가 평생을 바쳐도 다 읽어내기 힘든 방대한 텍스트 속에서 핵심적인 담론의 변화를 포착해낸다.
‘한의학의 과학화’라는 화두가 시대별로 어떤 어휘들과 결합하여 변천해 왔는지, 혹은 특정 약재나 처방에 대한 인식이 기술의 발달과 함께 어떻게 진화했는지를 통계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 이는 연구자의 주관적 통찰에 객관적인 데이터의 근거를 더함으로써, 한의학사 연구의 논리적 완결성을 높여주는 강력한 토대가 된다.
이제 우리의 연구는 기록의 ‘서술’에서 지식의 ‘설계’로 나아가야 한다. 인공지능 시대의 한의학사 연구는 파편화된 자료들을 온톨로지(Ontology) 구조로 체계화하는 작업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인물, 저작, 처방, 사건 등의 개체를 디지털 상에서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시맨틱 데이터(Semantic Data)’화함으로써, 누구나 쉽게 한의학의 지식 체계를 탐색하고 확장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해야 한다.
이러한 접근은 한의학을 박제된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인공지능이 학습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생동감 넘치는 데이터 세트로 변모시킬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현대 한의학이 디지털 시대에 살아남는 법이자 진정한 의미의 현대화일 것이다.
이제 원로교수의 나이에 들어선 필자의 입장에서 인공지능이라는 거센 파고는 두려움이 아닌 새로운 가능성으로 다가온다. 우리가 정성껏 수집해온 역사적 소스들이 디지털이라는 그릇에 담길 때, 비로소 한국 한의학의 정체성은 세계와 미래를 향해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論으로 풀어보는 한국 한의학’의 여정은 이제 인공지능과의 협업을 통해 더욱 깊고 넓어질 준비를 마쳤다. 후학들이 이 디지털 도구를 활용해 더 정교하고 아름다운 역사의 무늬를 그려나가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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