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 면허가 있기에 뭘 해도 자신감 있게 시도해 볼 수 있어”
[한의신문=주혜지 기자] 김창업 가천대학교 한의과대학 교수가 지난해 스탠포드 의대 방문교수로 1년간 연구년을 보내고 왔다. 본란에서는 김창업 교수의 미국 연구년 생활을 비롯해, AI 시대의 도래에 따른 한의사의 새로운 역할 고찰 및 한의학의 미래 전망을 들어본다. <편집자 주>
김창업 교수
가천대학교 생리학교실 NNSM Lab
Q.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린다.
A. 안녕하세요, 가천대 한의대 생리학교실 NNSM (neural network & systems medicine) 연구실의 김창업입니다. 인공지능의 이론적 프레임워크를 이용해 뇌의 계산적 원리를 이해하고 이를 한의학 이론과 임상의사결정 과정에 적용하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Q. 스탠포드 의대에서 연구년을 보낸 소회는?
A. 연구년을 맞아 스탠포드 의대 Raymond Lab에서 방문교수로서 1년을 보내고 왔습니다. 항상 목이 마른 연구자로서 세계 최고의 연구기관에서 다양한 연구자들과 부대끼고 교류하며 성장할 수 있는 이번 기회가 매우 소중했습니다. 한정된 시간이지만 가능한 많은걸 배우고 경험하며 느끼고 싶었고, 나름대로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낸 것 같습니다.
저를 초청해 준 Raymond 교수의 입장에선 계산과학적 측면에서 저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었기에 마치 박사후연구원처럼 프로젝트를 맡아 진행하며 랩 구성원으로서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문득문득 꿈 같았던 캘리포니아의 환상적인 풍광과 아름다운 스탠포드 캠퍼스가 아른거리네요. 가족과 나의 꿈을 모두 챙길 수 있었던 완벽한 1년이었던 것 같습니다.
Q. Raymond Lab에서 진행한 연구는?
A. Raymond lab은 소뇌의 학습 알고리즘을 연구합니다. 다양한 실험적 기법과 계산적 접근을 병행하며 이 분야를 이끌어온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실입니다. 저는 fiber photometry라는 이미징 기법을 이용해 기록된 소뇌 퍼킨지(purkinje) 세포들의 활성 데이터를 기반으로 다양한 속성의 감각 및 운동정보를 소뇌 세포들이 어떻게 부호화(encode)하고 있는지 밝히는 연구를 수행했습니다. 이를 위해 데이터 전처리 알고리즘과 수학적 모델을 개발했고 AI 기반의 분석 작업을 수행했습니다.
소뇌의 machine-learning theory-inspired computational model 개발은 현재 진행형으로 첫 연구결과를 정리해 현재 투고 단계에 있습니다. 이어지는 후속 연구들도 잘 진행이 됐으면 좋겠네요! 사실 이 연구는 서울의대 신경생리학 연구실과 공동으로 진행 중인데 Raymond 교수님과의 공동연구와도 접점이 있어서 앞으로 함께 발전시켜 나가면 좋겠다고 희망하고 있습니다. 기계학습의 수학적 이론과 실험 양 분야를 아우르는 주제라 사실 매우 어려운 주제입니다. 다행히 열정과 자질이 훌륭한 한의사들이 연구실에 합류해 도전의지를 불태우고 있어 향후 미래가 더욱 기대됩니다.
Q. 연구 내용을 어떻게 활용할 예정인지?
A. 스탠포드에 머무는 동안 Raymond 랩 소속으로서 소뇌의 학습 및 정보처리 기전을 연구함과 동시에 인공신경망 기반의 뇌인지모델 연구에 있어 세계적인 석학인 James mcclelland 교수님 연구실에서도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향후 한국에서 이 두 연구실과의 공동연구를 지속적으로 수행해나가고자 계획하고 있습니다. Raymond 랩과 진행하던 연구는 서울의대와 다기관 공동연구로 발전시켜 AI 이론 관점에서의 뇌 정보처리 기전 연구 프로젝트로 발전시켜 나갈 계획입니다. 또한 한의사가 진료할 때 한의사의 머릿속에서 진행되는 인지신경과학적 프로세스를 AI 기반으로 모델링하고 분석하는 연구를 수행하며 James 교수님에게 도움을 받을 예정입니다.
Q. 동료들의 한의학에 대한 평가는?
A. 솔직히 말씀드리면 연구실의 동료들과 한의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거의 없었어요. 한국인 부인을 둔 미국인 친구가 한의학 진료에 대해 한번 물어본 적이 있어서 상담해 주고 한국의 한의원을 추천해 준 적이 한 번 있긴 합니다.
스탠포드 의대에 연수 중인 한국인 의대 교수님들과 교류할 기회가 종종 있었는데 한국의 한의계 연구자들이 근거중심의학(EBM)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서 놀랐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게 생각납니다. 과거 한의계가 EBM 측면에서 공격을 많이 받다 보니 한의대생들이나 한의계 연구자들이 이 주제에 대해서 넘치도록(?) 많은 공부가 된 게 아닐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Q. 연구년 동안의 하루 일과는?
A. 연구년이라 학부 수업과 행정 업무가 없어 한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지만, 현지 연구와 함께 한국 랩의 멤버들과 공부 및 연구를 병행하려니 한편으론 쉬지 못하고 계속 일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던 것 같아요. 보통 아침에 일어나면 밤새 올라온 랩 메신저의 메시지들을 확인하고 긴급히 해결해줘야 할 부분에 답변하며 아이들 등교 준비를 시킵니다. 아이들 등교시키고 커피 한잔하며 여유를 잠깐 즐깁니다. 푸른 나무와 잔디, 아름다운 새소리, 완벽한 햇살, 풍광까지… 축복받은 자연환경을 만끽하며 커피 한두 잔 즐기다 보면 자칫 출근을 포기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억지로 떨치고 일어나 출근을 해야 합니다. 해가 빨리 지는 겨울을 제외하고는 보통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했습니다.
연구실 환경이 비교적 쾌적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간중간 건물 밖으로 나와 캠퍼스를 거닐며 사색을 할 때면, ‘이 말도 안 되는 날씨에 건물 안에 하루 종일 처박혀 있는 건 무언가 잘못된 일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보통 늦어도 7시 이전엔 퇴근해서 저녁 식사하고, 한국 연구실과의 미팅, 스터디 등을 진행하는데 아이들 재운 이후, 대개 미국 시각으로 10시에 회의를 하곤 했습니다. 학교에 있는 동안엔 연구실 안에만 있기보다는 다양한 수업을 청강하고, 다른 연구실 랩미팅에도 참여하고, 연구소 세미나들도 찾아다니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스탠포드엔 전 세계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이 늘 찾아와 높은 수준의 세미나를 열고 커피, 다과와 함께 열띤 토론을 하고 있기 때문에, 매주 그 현장에 함께 할 수 있다는 게 너무나 행복한 축복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2023년 때마침 실리콘밸리 발 AI 혁명이 시작됐고(chatGPT와 같은 거대언어모델의 출현), 사실 이와 관련된 공부와 연구로도 매우 흥분되고 바쁜 나날들을 보냈습니다.
연구년 기간이었지만 석사 및 박사과정 신입생들이 연구실에 합류했고, 원격으로 공부하며 같이 논문을 쓰기도 했습니다. 김준동 박사과정 신입생은 경희대를 졸업하고 전문의까지 취득한 재원으로 본인의 전공을 살려 진료수행시험 연습용 챗봇을 개발했고, 이를 논문으로 완성해 대한한의학회지 3월호에 출판했습니다. 온라인 미팅을 통해 매주 2회가량 소통하고 있었기에 함께 논문 작업을 하는 것에 큰 무리는 없었습니다. 역시 경희대를 졸업하고 기업 및 임상에서 경험을 쌓은 뒤 랩에 합류한 윤태림 석사과정생 역시 한의사로서의 경험을 살려 GPT-4를 프롬프트 엔지니어링하고 한의사 국가시험에 합격시키는 연구를 선배 대학원생들과 함께 마무리 지었습니다.
Q. 개원일변도인 한의계에서 계산신경과학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는?
A. 어렸을 때부터 내가 왜 존재하는지, 왜 고통을 느껴야 하는지, 왜 결국 죽어야 하는지와 같은 철학적인 질문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세상이 경이로웠지만 동시에 너무나 무서웠고 그 두려움 때문에 어떤 궁극적인 답을 찾고 싶어 했던 것 같습니다. 중고등학교 재학시절 이런 성향이 동양철학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자연스럽게 한의학으로까지 연결됐던 것 같아요. 한의대 졸업 이후 곧장 연구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그저 의사로서 인체를 더 깊이 알고 싶다는 생각으로 기초의학을 전공하게 됐는데 원래의 철학적(?) 성향 때문에 신경과학으로 전공을 정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다시 뇌신견망의 작동원리를 이해하려면 수학을 바탕으로 한 계산적 접근이 필요함을 느끼고, 이후 컴퓨터공학부 AI 연구실과 통계학 대학원, 수학과 등을 거치며 여기까지 이어지게 됐습니다. 보통 한의대 졸업하고 임상 안 하는 걸 색다르게 생각하는데, 한의사 면허가 있기에 뭘 해도 자신감 있으니 하고 싶은 거 다 시도해 보고 자유롭게 살고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Q. NNSM Lab의 제자들 사랑이 각별한 것 같다.
A. 그렇게 봐주셨다니 감사합니다. 사실 저는 제가 좋아하는 주제를 공부하고 떠드는 거 좋아하는 덕후인데요, 원래 덕후는 보통 외롭습니다. 주변의 사람들과 함께 열정을 공유하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대학원에 찾아온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나와 함께 덕질을 하자고 하는 거니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AI 시대, 새로운 방식의 삶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면 NNSM Lab에서 함께 공부해 보길 권하고 싶습니다. 의학계열의 전공자들이 갖추지 못한 quantitative science의 무기를 장착하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기초수학/통계, 컴퓨터 지식부터 대학원 수준의 고급수학/통계/인공지능 이론까지 소화해 내야 하는 과정이 쉽진 않습니다. 어려운 내용들이지만 이를 한의사에게 NNSM Lab보다 잘 가르쳐줄 수 있는 곳은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배우고, 도전하고, 지적인 흥분을 느낄 수 있는 짜릿한 길이 있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어요!
Q. 앞으로의 계획은?
A. 2023년을 기점으로 AI가 인류의 미래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역사가 시작됐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2010년 무렵부터 AI 분야 일을 해왔는데, 2023년 거대언어모델(LLMs)의 출현은 그간의 예상들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익숙했던 많은 것들과 하루아침에 결별하고 새로운 질서에 적응해야 하는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일단 앞으로 3~5년 정도 새로운 시대의 출현을 최대한 가까이서 관찰하며 나름의 준비를 해나가려고 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 필요한 것, 그리고 스스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수준에서 고민해 보려 합니다. 기존의 관성을 벗어나 과감히 움직여보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 SF물의 주제처럼 느껴졌던 ‘AI의 의식’ 문제가 인류를 큰 혼란에 빠트릴 수 있는, 시급히 풀어야 할 당면과제로 떠오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실제로 뇌와 AI 양쪽에 나름의 전문 지식을 갖춘 입장에서 보다 진지하게 이 분야를 연구해 보려는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A. ChatGPT와 같은 생성형 AI 기술의 폭발적 발전이 모든 분야에서 기존의 상식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대중이 피부로 느끼기까지 약간의 시간 차가 있을 뿐, 이미 우리는 SF가 현실이 되는 새로운 시대에 진입했습니다. 발전이 발전을 가속화하는 양의 피드백 고리가 빠르게 돌기 시작했고 1년간의 변화가 기존 수십년의 변화를 넘어서는, 인류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두려운 시대에 진입하고 있습니다. 의사의 전문성과 역할에 대한 기대 역시 많은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굳게 믿어왔던 의학, 의사에 대한 모든 상식이 내일은 더 이상 상식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의료 전문지식과 기술들이 빠르게 AI와 로봇의 영역으로 이식됨에 따라 습득한 전문지식을 반복해서 적용하는 ‘사용자’ 역할보다,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는 ‘창조자’의 역할이 중요해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새로운 과학과 의학의 발전은 AI를 빼놓고 논할 수 없을 것이며, 데이터와 AI, 계산적 방법론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의학을 발전시키는 역할이 새로운 시대의 의학 전공 엘리트들에게 요구될 것이라 예상합니다.
이제 막 시작된 AI 시대, 한의학과 한의사가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 정답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한의학을 전공한 우리가 스스로 정의하고 만들어 나가는 대로 결정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보다 많은 한의사들이 함께 고민하고 생각을 나누며 준비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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