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숙 여의도 책방-47

기사입력 2023.12.21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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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텨내야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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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미숙

    국회사무처 부속한의원 원장

    (前 부산대 한의학전문대학원 교수)


     

    2023년 1월에 쓴 칼럼을 다시 꺼내 읽어본다. 마감일 닥쳐 겨우 써낸 내 글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상당히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래도 ‘무슨 생각으로 올해를 시작했던가?’ 회상을 제대로 해내려면 근거가 필요하다. 제목은 『그 나이에는 그 나이가 흐른다』였고 장자크 루소의 주치의인 티소의 책 『읽고 쓰는 사람의 건강』의 서평이 글의 주된 내용이다. 글 말미에는 그 달 설연휴 이틀에 걸쳐 MBC에서 방송된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의 주인공이신 김 선생님께서 등산에 임하는 자세로 소개하신 “사부작 사부작 꼼지락 꼼지락”처럼 나 역시 그런 자세로 한 해를 살아가겠다고 소박하게 다짐을 하고 있었다.   


    2023년 1월20일 금요일자 한겨레신문에는 『평생 처음 한 인터뷰 얼마나 베푸셨나 물으니 입 꾹 다문 참어른』이라는 제목으로 김장하 선생님을 다룬 전면 기사가 실렸었다. 이 기사를 통째로 진료실 책상 앞 파티션에 붙여둔 채 올해를 시작했다. 1년 가까운 시간을 입은 신문지의 색깔은 누런 갱지처럼 약간 탈색이 되어가고 있다. 진료실과 치료실을 수없이 오가며 PC 모니터로부터 눈을 약간 들어올리면 기사 속 인자하신 김 선생님의 얼굴이 바로 보인다. 선생님 얼굴을 꽤 자주 들여다 보았고 그 기사를 반복해서 읽었다. 2023년 한 해를 버티도록 힘을 주셨던 선생님의 2부작 다큐는 올해 4월 백상예술대상에서 지역방송사(경남MBC) 최초로 TV 부문 교양 작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러닝타임 105분으로 편집되어 영화로 재탄생한 이 작품은 현재 넷플릭스에서도 볼 수 있으며 지난 11월16일 국회의원회관 2층 대회의실에서는 영화상영회와 함께 제작진이 참석한 GV(관객과의 만남)가 개최되기도 했다. 놀라운 사실은 김장하 선생님께서는 다큐든 영화든 당신이 주인공으로 출연하신 이 영상을 아직도 보지 않으셨고 앞으로도 볼 생각이 없으시다는 것이다. 


    ‘사부작 사부작 꼼지락 꼼지락’하는 한 해 였을까?


    선생님의 이 한결같은 묵직함과 겸손함은 훌륭하다 혹은 대단하다 등의 그 어떤 감탄사로도 표현이 되지 않는다. 올해 초 선생님께 배운 주문 “사부작 사부작 꼼지락 꼼지락”을 읊다보면 ‘하던 일 계속 하고, 가던 길 쉬지 않고 걸어가는 것, 그것이 삶이구나’ 싶은 작은 깨달음에 도달한다. 그렇게 일년 이년 살다 보면 밥은 먹고 살 수 있을 것이고 운이 더 따라준다면 김 선생님께서 하셨던 일의 1000분의 1 정도의 크기로라도 이 사회에 좋은 일을 할 여유를 가지게 될 지도 모른다. 

     

    여러 종교를 넘나들며 영성과 마음 공부에 관한 유명한 혹은 초야에 묻혀 지내시는 수많은 구루(guru)들과의 대담 영상을 주로 올리시는 조현 기자의 『조현TV 휴심정』이라는 유투브 채널을 자주 보고 듣는다. 죽음학의 대가로 알려진 종교학자 최준식 교수님이나 『불교정신치료 강의』의 저자인 정신과 전문의 전현수 박사님을 알게된 것도 이 채널을 통해서였다. 부적 팔고 사주관상 봐주는 승려가 무당과 무슨 차이냐며 불교가 가야 하는 바른 길을 주창하시는 향봉 스님 말씀이 반가워서 국회도서관에서 스님책을 찾으니 2023년 5월과 8월에 출간된 신간 『산골 노승의 화려한 점심』과 『산골 노승의 푸른 목소리』가 검색되어 서둘러 대출을 신청해본다.


    종교가 없는 나로서는 여러 종교 지도자들의 말씀을 접하며 종교를 가질 필요성을 느꼈다기보다는 죽음과 영성에 대한 일정한 경지에 오르신 분들의 깊은 고뇌와 그 고뇌에 이르기까지의 삶의 굴곡진 사연들을 통해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끝’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 볼 계기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잘 살다가도 가끔 두려운 순간을 마주했을 때, 여러 대담 속 오가는 대화에 집중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너무도 자연스럽게 눈을 감고 깊은 호흡을 반복하게 된다.   

     

    바쁘고 정신 없는 일상 속에서 숨구멍이 되어 주셨던 『조현TV』의 많은 대가들 중에 유독 마음이 끌리고 그래서 귀를 쫑긋 기울이게 되었던 분이 고등학교 시절 조각가를 꿈꾸었다가 치대에 진학하여 치과의사로 임상을 14년 하신 후 불교학도로 진로를 변경하셔서 2000년부터는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불교학과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하신 김성철 교수님이셨다. “질병을 불교적 관점으로 보면 달라지는 것들”, “윤회가 있다는 것들 증명할 수 있을까”, “불교수행의 목표” 등의 강의들은 듣고 또 들어도 좋았다. 불교 공부를 길고 끈질기게 하신 결과물로 들려주시는 여러 말씀들을 통해 어렵게만 느껴졌던 불교에 관련된 몇 가지 의문들에 대해서는 아주 명쾌한 답을 얻을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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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과의사 출신 불교학자 김성철 교수의 가르침


    잊어버릴만하면 조 기자님 채널에 가끔 들어가 새로 올라온 영상을 한번씩 보곤 했었는데 지난 11월23일에는 김 교수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했다. 향년 67세. 생전 『치의신보』와의 인터뷰에서 “치과의사 시절 하루에 내가 최선을 다해 진료할 수 있는 최소한의 환자만을 보고 불교 공부를 했다. 생각해 보면 치과의사란 직업만큼 정직한 직업도 없는 것 같다. 우리가 한 치료내용이 환자들에게 그대로 남으니 말이다. 치과의사들이 조금만 덜 가지려 한다면 더 편안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라고 하셨던 말씀도 떠오른다(2016년 7월). 『불교신문』과의 인터뷰에서는 “다른 인문학과 달리 삶과 죽음을 추구하는 학문이 불교학이기 때문에 희망이 있다. 불교학은 보다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면서 삶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한다”라고도 하셨다(2019년 1월). 


    대승불교의 아버지이자 ‘제2의 붓다’로 불리는 용수(나가르주나)의 중관학으로 석박사를 취득하신 김 교수님은 10여 권의 저서(역서)와 70여 편의 논문을 남기셨다.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된 몇 저서들은 어려워서 감히 읽을 엄두가 안 나고 기존의 글 모음으로 작년 11월에 출간된 『불교적 심신의학과 생명윤리』의 일부는 그래도 접근 가능한 것들이라 아래와 같이 옮겨 본다. 



    - 뇌과학의 최신 연구성과에 비추어 보면 인간은 물론이고 생명체의 모든 체험이 다 그럴 것이다. 우리들이 체험하는 세상만사는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듯이 우리들 각자 하나씩 갖고서 혼자만 보는 ‘상자 속의 딱정벌레’와 같다. 모든 것이 나의 주관적 체험이다. 

    - 주관! 내가 보기에는 분명히 실재하는데, 체험되는 것은 나의 주관 뿐이다. 남의 주관은 그 존재를 추측할 수는 있어도 체험할 수는 없다. 우리의 마음 또는 의식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일까?

    - 무의식이 의식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지만, 마음의 정체를 구명하고자 할 때 그 중심에 있는 것은 명백한 의식이다. 라이프니츠(Leibniz, 1646∼1716)는 “도대체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언가 존재하는가?”라는 ‘존재의 근본 의문’을 토로했지만 이는 “도대체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의식이란 게 있는가?”라는 ‘마음의 기원에 대한 의문’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 객관 세계의 모든 것들은 언제나 주관인 의식에 의해 그 존재가 확인되기 때문이다. 도대체 의식이란 무엇인가? 마음이란 무엇인가?

    - 불교의 경우는 내담자의 고통이 무엇이든, 명상을 통해서 사성제의 진리를 철견(徹見)할 때 모든 심리적 고통이 해결된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그 방식이 독특하다. 혹 상담자가 개입한다면 상담자는 내담자로 하여금 사성제를 철견할 수 있도록 지도해 줄 뿐이다. 이와 달리 정신분석에서는 상담자가 내담자의 무의식을 드러냄으로써 심리적 고통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 생명공학을 포함한 의료기술에는 인류의 질병 치료라는 밝은 측면이 있지만, 그 이면에는 이를 위해 실험실에서 살해당하는 무수한 실험동물들의 고통이 수반되어야 한다. 오늘 이 순간에도 수많은 실험동물들이 인류의 복지와 안락을 위해 희생당하고 있다. 인류라는 생명군이 누리고 있는 지금이 이 풍요는 다른 생명군의 처참한 희생을 딛고 이룩된 것이다. 



    김 교수님은 생전에 “남을 내 몸과 같이 여기는 ‘이타의 감정’인 자비와 ‘절묘한 분별’을 하는 지혜가 없다면 깨달은 게 아니다”는 말씀으로 자비와 지혜를 갖춘 인지적 수행의 중요성을 강조하셨고 감성적 정서적 정화가 이뤄지지 않은 가운데 머리로만 이성적인 깨달음에 이르렀을 때의 위험함을 경고하셨다. 


    고통과 죽음이 왜 있냐는 질문에 애초에 생성과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불교학에서의 가장 근본적인 법칙을 떠올리면 유독 이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모여있는 동네가 있는데 이는 동네 노인정이 아닌 국회다. “이러다 다 죽어!!”가 아닌 “나, 다시 돌아갈래!!”라는 영화 대사가 훨씬 어울리는 2023년 연말의 국회는 벌써부터 복작거린다. ‘아름다운 퇴장’이라는 내리막길을 걸어가다가 유권자들로부터 완벽하게 잊혀지는 존재가 되어야 마땅할 72세의 김모, 정모 전 의원님과 75세의 이 모 전의원님도 모자라 팔순을 넘긴 박 모 전 의원님까지 내년 4월 총선을 준비하고 있다는 뉴스가 들려온다. 참담함을 넘어 공포 그 자체이다. 


    자비와 지혜 갖춘 인지적 수행의 중요성 강조


    지역소멸과 그에 따른 지방국립대의 위상 추락, 흑사병 창궐 수준에 비유되는 역대 최저를 기록한 저출생과 인구감소 거기에 우울증과 외로움에 잠식당한 것도 모자라 저렴한 중국산 마약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우리의 10∼20대들 문제들은 논외로 쳐박아 둔 채, 몇몇 정치인들에게는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초고령 시대만 보이는 모양이다. 청년 비례니 젊은 당대표니 온갖 미사 여구에 정치판으로 모여드는 젊은층들을 띄워주는 모양새는 완벽한 연기였다. 


    그 초고령 시대의 파도 위에 “우리는 그래도 이렇게 버텨냈다!”라고 소리치는 꼴이라니 볼썽사납다. 3선, 4선도 모자라 5선, 6선에 도전하며 출판기념회에 몰려든 인파 사진을 페이스북에 게시하며 ‘여기 모인 노인들 중에 내가 젤 잘 나가는군’ 생각하며 뿌듯하셨을 것이다. 내년에 이분들이 모조리 국회에 입성이라도 하신다면 그리 멀지 않은 날, 22대 국회는 강시국회 혹은 좀비국회 아니 백세 시대를 반영하는 ‘노인이 최고당’ 국회로 조리돌림 당할 것이다. 늙었다고 모두 낡은 사람들은 아닐테지만 70∼80대 어르신 의원들이 바글대는 국회가 과연 이 나라의 미래를 논할 수 있을까? 조용히 뒷방에 찌그러져 있는 것이 노인의 미덕이나 의무는 아니더라도 박수칠 때 떠나야 하고 또한 떠날 때는 말없이 사라져야 한다. 쇠퇴의 길은 누구에게나 닥치기 마련이기에 고인물들이 증발되어야 그 자리에 새 싹도 나는 법이다. 버텨내야 존재하는 미미한 존재들은 이토록 삶이 만만치 않은데, 맨 꼭대기에서 단물만 쪽쪽 빨며 다 누려온 자들이 끝까지 삶의 절정만을 맛보며 죽는 그 날까지 현역으로 살겠다고 덤벼드니 그 맹렬한 투지는 아름답다기보다는 추악하다.


    많은 도전과 변화 있었던 2023년 ‘아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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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텨내고 존재하기』는 음악인 최고은이 바라본 광주스러움을 나누고자 초대한 일곱 뮤지션이 광주극장에 방문하여 각자의 ‘버텨내고 존재하기’에 대해 말하고 노래하는 다큐멘터리 영화로 올해 11월1일 개봉했다. 광주극장은 1933년 설립된 호남지역 최초의 극장으로 1935년 개관하여 현재까지 같은 자리에서 영화를 상영 중인 단관극장이다. 이 극장에는 1990년대부터 오늘까지도 상영 중인 영화의 대형 간판을 손으로 직접 그리는 화백님이 여전히 근무 중이시다. 1935년부터의 역사도 단관극장으로서의 일관성도 아날로그식 간판의 고집도 버텨냈기에 존재하고 있고 존재하고 있기에 2023년 영화의 소재도 될 수 있었다. 

     

    20년간의 봉직의 생활을 마치고 53세에 처음으로 암사역 근처에 한의원을 개원한 성실왕 선배님이 계신다. 30대 중반에 첫 번째 한의원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짓고 이제는 지역도 규모도 월세도 역대급인 곳에서 두 번째 도전을 준비 중인 능력짱 제자도 있다. 광주광역시에서 첫 번째 한의원을 잘 해내고 이번에는 대구광역시로 지역을 옮겨서 두 번째 도전을 준비 중인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중인 또 다른 제자도 있다. 5년간 프랜차이즈 한의원 운영을 잘 해낸 후 입시준비를 본격적으로 해야 하는 딸냄을 위해 잠시 개원가를 떠난 후배도 있다. 올 한 해 한의계의 수많은 동지들도 많은 도전과 변화를 마주했을 것이다. 버텨내기 위해 용을 썼고 그 결과 이 순간 우리는 존재하고 있다. 내년에는 너무 애만 쓰는 버티기 말고 각자의 존재감을 색다른 방식으로 뽐내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래본다. “미리 메리 해피뉴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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