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저온 보리한의원장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공연 현장에서 느낀 바를 에세이 형태로 쓴 ‘시선나누기’ 연재를 싣습니다. 문저온 보리한의원장은 자신의 시집 ‘치병소요록’ (治病逍遙錄)을 연극으로 표현한 ‘생존신고요’, ‘모든 사람은 아프다’ 등의 공연에서 한의사가 자침하는 역할로 무대에 올랐습니다.
어느 날 그가 사진을 보내왔다. 포스터에는 파동이라는 굵은 글씨 양옆으로 물결무늬가 펼쳐져 있었고, 강해진 바이올린 솔로라고 적혀 있었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건 물론 그의 뒷모습이었다. 뒷머리에 포갠 손끝에 매달리듯 걸려 있는 바이올린은 구멍도 현도 보여주지 않고 단아한 나무의 질감과 수려한 곡선을 뽐내며 그의 등허리를 가리고 있었다.
역시! 나는 혼자 웃었다. 그는 세다. 그는 아름답다. 과감한 시도에 놀라면서 나는 파동이라는 말과 바이올린에 적힌 잔혹동화라는 말을 입에 굴려보았다. 파동 아래로 자그맣게 적힌 상암동 문화비축기지 T4라는 낯선 공간의 이름과 ‘영상작품, 대고, 영상 사진기록, 음향’ 등 참여자들의 이름이 모호하면서도 실험적인 무대를 마구 상상하게 했다. 바이올린은 그의 머리채 같기도 하고 그의 몸 같기도 하다. 그는 바이올린 같다.
잔혹동화 같은 인생
오랜만에 전해온 바이올리니스트의 소식에 기뻤다. 무엇보다도 오래 작업해온 결과물로 무대에 서는 가장 빛나는 소식이니까. 그는 그때도 지금까지도 늘 현재진행형이다.
‘안녕하세요? 건강하시죠? 멀리 계시지만 제 공연 소식 전해드려요.’ 문자 속에서 그가 웃는다. ‘이번 달에 오래 준비한 앨범이 CD로 발매되었어요. 원래 기획했던 공연을 발매 기념 겸 준비하고 있어요.’
그가 보내준 팸플릿 사진 몇 장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그는 잔혹동화라는 잔혹한 말을 여기다 왜 썼을까. 잔혹동화는 그의 공연 이야기일까. 음악 내용일까.
인간관계에서/ 외면하고 싶은 감정들/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처받기 싫어서/ 스스로를 소외하는 사람들/ 상대를 알고자 두드려보고/ 섞이고자 눈치 보고/ 관계를 지속하고자 노력하는/ 지지부진한 일상들/ 그 모든 것은 환상... 잔혹동화 같은 인생.
그는 관계를 그리고 있었다. 사람 사이를 느끼고 들여다보고 바이올린으로 옮겨오고 있었다. 그는 상처받은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스스로를 소외하는 사람일 수도 있으며, 관계를 지속하고자 또한 노력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환상이라고, 그는 여기는구나…….
그의 눈매와 자태처럼, 그는 강하다
바이올리니스트 강해진 솔로 공연 <파동>. 그 아래에는 잔혹동화: Everything is Nothing, Nothing is Everything 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그는 이만큼을 살며 연주하며 걸어와서는 Nothing이라는 말을 곱씹고 있었다.
‘나의 존재를 묻고 나의 외로움을 묻어버리고 그리움을 찾아 너를 두드려 본다’. 첫 음악 ‘Knock’.
‘깊은 바다를 유영하는 그대는 세이렌 소리에 매혹되는 일은 없겠구나. 수면의 높은 파도가 그대에게 닿지 않으니 평온한 그대의 세계가 영원하기를’. 두 번째 음악 ‘52Hz whale’
이렇게 묻고 두드리고 바라던 사람은 시간이 흐를수록 이런 말을 되뇐다.
‘아무 일도 없는 듯 지내는 일상은 부조리의 연속이다. 소화되지 못한 시간은 역하게 목구멍으로 스멀스멀 올라온다. 더 이상 아프지 않게 해 주세요. 아픔을 껴안게 해 주세요. 아픔을 사랑하게 해 주세요.’ 다섯 번째 음악 ‘기도’.
그리고 마지막 일곱 번째 음악이 ‘Dark fairy tale’이다. 잔혹동화. ‘그림자는 왜 따라다녀요? 혼자 다니면 외로울까 봐 엄마가 꿰매 준 거야.’
여기까지 읽고 나자 음반을 관통하는 그의 간절함과 외로움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그러나 그는 주저앉지 않고 기도하고 있구나. 말하고 있구나. 바이올린 현에 활을 얹고 무대에 서 있구나. 몇 년 전, 맨 처음 공연장으로 걸어오던 그의 눈매와 자태처럼, 그는 강하다. 그는 아름답다. 그리고 나를 향해 인사를 건네던 그의 웃음처럼 그는 생기롭고 다정하다.
‘관객과 연주자가 각각의 에너지의 포인트가 되고 그 에너지가 서클을 이루어 점점 커지면서 맞닿게 되는 경험’이라고 공연 내용을 설명한 글이 보인다.
‘서사적인 음악에 변화하는 빛과 그림자는 누워서 관람하는 이들을 무한 상상의 세계로 이끌게 될 것이다.’
누워서 관람을 한다고? 나는 공연이 끝나고 일주일이 지나 그에게 안부를 묻는다. 성황리에 잘 마쳤냐고 하자, 공연 끝나고 허리를 못 움직여서 침을 맞았다고 한다. ‘선생님 생각이 났어요. ㅠㅠ’ 이틀을 누워만 있었다고, 이제는 천천히 걸을 수 있다고 그는 웃는다.
검은 동자가 사막을 건너는 것 같아
관객들이 누워서 관람을 했느냐고 묻자, 커다란 빈백을 놓아두고 같은 공간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했다고 한다. 보내준 동영상에서는 어두컴컴한 창고 같은 공간에 빛으로 쏘아 올린 영상이 폭포처럼 흘렀다가 고였다가 퍼진다. 그 아래 자그마한 몸집의 그가 바이올린 한 대로 그 파동에 몸을 싣는다. 바이올린 선율이 만드는 파동이 빛의 파동에 포개지며 부딪친다. 직접 못 가 본 것이 점점 더 아쉬워진다.
정통 클래식 음악을 하지 않고 즉흥연주와 창작연주를 하며 공연장에 서는 그의 길이 외롭고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공연장이란 게 때로는 산비탈 숲속이고 때로는 해가 지는 바닷가라고도 했다.
‘Wrong Distance’라는 곡에 그는 이렇게 써놓았다.
‘눈이 너무 건조해져서 검은 동자가 사막을 건너는 것 같아. 피우지도 않을 손가락 끝에 걸려 있는 세 번째 담배의 연기 그물에 운 좋게 걸리면 검은 동자는 눈물을 쏟아 내겠지. 반짝이는 비늘 같은 눈물이 연기 그물에서 춤을 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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