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숙 여의도 책방-42

기사입력 2023.07.20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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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Bridge over troubled wa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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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미숙

    국회사무처 부속한의원 원장

    (前 부산대 한의학전문대학원 교수)


     

    가족들 이야기를 포함해서 소소한 일상까지도 가끔 공유해주시는 마음이 따뜻한 의원님이 한 분 계신다. 최근 의원님의 둘째 따님이 하버드 로스쿨에 최종 합격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땐, “웬만해서는 의원님 학력을 뛰어넘기가 어려웠을텐데, 그 어려운 걸 해냈네요. 둘째딸들이 원래 그렇습니다요!!”하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둘째딸 출신 셀럽들 몇 명을 거론하면서 슬그머니 “의원님, 저도 둘째딸입니다. 하버드 근처에도 못 가 보았지만요”라면서 농담을 보탰다. 유난히 둘째딸들이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사람들이 많더라 하시며 연신 기분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신다. 국회의원들은 왠지 딱딱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진료실에서 의사-환자의 관계로 만나게 되면 겉으로 보여지는 것보다 실제로는 소박한 분들이 훨씬 많은 편이다. 보다 원활한 진료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권위적인 성격의 강약이나 소속 정당의 컬러보다는 ‘대화 원활 Vs 대화 힘듦’의 구별이 내게는 보다 중요한 문제다. 환자의 성향을 더 잘 파악하여 세밀한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노력 중 하나이다. 짧은 문진이라도 집중해서 대화를 나누다보면 이 사람이 어떤 성향인지 대강 파악이 된다. 그가 누구라도 1분이면 쌉가능이다.


    상황에 맞는 대화, 원활한 진료 위해 ‘중요’  


    그들의 서로 다른 성향을 파악해야만 각기 다른 기대에 부응할 수가 있고 진료실에서 퇴장할 때의 만족도를 상대적으로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좋아 빠르게 가!”라는 구호처럼 신속 명쾌를 원하시는 분에게 주저리 주저리 설명을 하고 있으면 가끔은 바쁜 분들의 귀한 시간을 빼앗는 눈치 없는 사람이 되기 십상이다. 대신 간만에 시간을 내어 여유있게 이것저것 설명도 듣고 휴식까지 챙기고 싶은 분이 내원하신 거라면 말하는 속도 혹은 발걸음 까지도 한 템포 느리게 속도를 늦출 필요도 가끔 있다. ‘이렇게까지 맞춤 진료를 한다고?’라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겠지만 “매일매일 이런 각오로 진료하고 있습니다”라는 다짐을 혹은 내 속마음을 살짝 드러내는 것으로 의심에 대한 변명을 대신해 본다.

      

    퇴직을 앞둔 보좌관 한 분이 여행하는 젊은이들의 용기가 대단하고 여행에서 보여지는 모습들이 이쁘다며 『노마드션』과 『 차박차박』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추천해 주셨다. 한 유튜버는 어학실력과 외모가 출중해서 확실히 해외를 돌아다니는 데에 유리한 것 같고, 다른 한 유튜버는 전세계 구석구석을 도보로 여행하는 에피소드를 연재하고 있는데 그 어떤 TV 여행 프로그램에서도 다룬 적 없는 유명하지 않은 그래서 인적이 드문 숨겨진 길들을 대신 보여주고 미리 걸어주는 느낌이라 이 친구를 볼 때마다 더 늙기 전에 나도 저런 여행을 해봐야지하는 생각이 든다며 퇴직 후의 여행과 그 계획을 실천하기에 과연 건강이 따라줄지에 대한 걱정을 미리 하고 있는 중이라신다.     


    ‘여행, 그래 여행은 적어도 한달살이는 해야 그게 여행이지. 아니지 반년은 떠나야지. 아냐, 일을 아예 쉰다면 1년 정도는 세계여행 그거 못 떠나겠어?’라고 생각해도 말만 쉽다. 개원이든 봉직의로의 이동이든 다음의 근무지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맘 편히 한달, 반년, 일년을 여행한다는 게 보통 일은 아닐 것이다. 가족 눈치, 친구 눈치, 지인 눈치의 “부담의 삼각형” 안에서 웬만해선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인들로서는 긴 해외여행은 늘 유튜브 안에서나 가능한 세상이니까. 그래서 친한 후배 하나는 이틀 연휴만 생기면 바로 짐을 싸서 떠난다고 한다. 하루라도 낯선 공기를 코에 좀 넣고 들어와야 지루한 일상을 버틸 수 있다며 하는 말 “선배, 난 보중익기탕이 아니라 타이뻬이 야시장에서 먹는 우육탕이 보약이더라!!”  


    당분간은 긴 휴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나는 요즘 목요일 오후에 지속적으로 반차를 신청하여 주 4.5일만 진료하는 스케쥴을 굳혀가고 있다. 『맥스달튼, 영화의 순간들』(63아트)이나 『라울뒤피, 프랑스 국립현대미술관전』(더현대서울)처럼 여의도 근처에서 열리는 전시회도 평일 오후는 무척이나 여유롭다. 주말에 방문하면 헬이라는 핫플 아니 핫플은 아니더라도 꼭 가보고 싶은 장소들을 도장깨기 형식으로 혼자 혹은 시간이 되는 지인들을 만나 목요일 오후의 여유를 챙기고 나면 금요일 진료는 아무리 힘들어도 퇴근할 때까지 힘이 남아돈다. 휴식의 효과가 이렇게나 크다.


    평일 오후 찾은 인왕산 초소책방에서의 추억  


    몇 주 전 그 날은 인왕산 초소책방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은 날이었다. 카카오택시로 책방 주차장까지 쓩 날아가면 될 일이었지만 대중교통으로 가는 길도 알아두고 싶었다. 일단 1002번 버스로 광화문까지 이동, 하차 후 교보문고를 지나 KT광화문지사 앞에서 종로09번 마을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리면 걸어서 10분 정도라는 경로를 머리에 넣고 일단 출발. 막상 종로 09번 종점인 수성동 계곡에 내려서 지도앱을 켜고 교회 하나, 절 하나 지나고 보니 ‘해맞이 동산’이라는 표지석에서 잠시 멈춤. ‘앗, 이제 어디로 가지?’ 두 개의 갈림길 앞에서 잠시 땀을 닦고 다시 지도를 보려는데 표지석 뒤 아담한 공원 안에서 어깨운동용 도르래를 돌리고 계시던 어르신 한 분이 “초소 책방 가는 거 아니요?”라고 말을 건네신다. 


    “아 네.. 어르신. 감사합니다. 어떻게 바로 알아보시네요.” “다들 여기서 어디로 갈까.. 하고들 서 있더라구요. 오른쪽 큰 길로 가면 영영 못 가요. 이 쪽 나무 데크 따라서 그냥 죽 올라가요. 중간에 갈림길 나와도 좌우 다 상관 없고 그냥 위쪽으로 죽 그렇게 그냥 10여분 올라가면 차 다니는 도로 나와요. 거기서 오른쪽으로 2∼3분만 걸어가면 바로 주차장 보일거요. 거기가 초소책방이오. 빵도 싸고 경치도 좋고 오늘 바람도 불고 좋은 날 오셨구먼. 평일날 와야 해. 주말에는 영 파이야. 주차도 몇 대 안 되고.. 초소책방 들러서 커피 한 잔 하시고 그냥 내려오지 말고 인왕산 숲속쉼터도 검색해서 거기도 꼭 들러요. 두 군데 다 좋아요.” 


    어르신의 친절한 설명 덕분에 15분도 채 되지 않아 초소책방을 찾을 수 있었다. 어르신의 당부대로 근처의 숲속쉼터까지 들러서 인왕산의 초록를 만끽한 후 대로변 좌측으로 뻗어있는 긴 산책로를 따라 죽 걸어내려가니 경복궁역이 그리 멀지 않았다. 메밀 두 글자가 포함된 유명한 막걸리집에서 시간 맞춰 나와준 친구와 점저를 먹으며 초소책방 가는 길을 알려준 어르신 이야기와 최근 다녀온 그의 여행 이야기로 즐거운 대화를 이어나갔다. 다음 번에는 노들역 근처 “더한강”이라는 카페에서부터 망원한강공원 “덕덕구스” 맥주집이 있는 곳까지 자전거로 한강변을 한번 달려보자며 아쉬움을 뒤로 하고 그렇게 헤어졌다. 평일의 낮술과 수다!! Couldn’t be better!!! 


    지난번 내 글을 꼼꼼히도 읽은 어떤 동기가 “야! 『엘리멘탈』이 어떻게 오행의 속성을 담아낸 이야기냐? 물과 불의 상극을 뛰어 넘는 러브스토리라면 몰라도...『엘리멘탈』에서 오행을 끌어내다니 너무 심하신거 아닌가?”라며 안부를 물어온다. “오행이나 한의학을 담아낼 영화나 애니가 나올 리가 영영 없어보여서 물불 나오니 너무도 반가워서 좀 끌어다 땡겨썼다”하면서 간만에 서로의 평안을 문답하다가 갑자기 부산대 한의전 졸업반들 특성화실습 이야기가 나왔다. 학생 하나가 본인 한의원에 짧게라도 와 있고 싶어하는데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길래 방문을 허락해 주는 것만으로도 그 학생에게는 큰 선물일 거고 개원가의 참혹한(!) 혹은 짜릿한(?) 현실도 알려주고 대신 너무 겁먹지 않도록 적절한 긴장감으로 무사히 국시 준비에 임할 수 있도록만 해줘도 충분할 것 같다는 내 의견을 말해주었다. 


    매년 이맘 때쯤 한의대 졸업반 학생들의 국회 실습을 부탁하는 연락들이 여기저기서 오곤 했다. 지난 몇 년간은 코로나라는 만능키가 있었기에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한 거부의사를 맘 편하게 밝힐 수 있었다. 코로나 덕분에 덜 미안했었다는 말이다. 코로나가 느슨해진 요즘이지만 진료가 많은 탓에 그 좁은 공간에 학생들이 한두명이라도 앉아 있다 생각하면 이 또한 불편할 일이라서 ‘그 누가 부탁을 해 오더라도, 이건 무조건 NO다’라고 굳게 마음 먹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산대 졸업반임을 밝힌 한 학생으로부터 국회 실습을 허락해 달라는 이메일을 받게 되었다. ‘무조건 NO!!’라는 심정으로 한줄한줄 읽어내려가는데 그 학생의 아버님 성함을 확인한 순간, 나의 강려크한 의지는 사르르 녹아버렸다. 수년 전 내가 학술이사로 몸담고 있었던 학회의 춘계학술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한 세션의 연사로 그 분을 꼭 모시고 싶었다. 당신이 속해있는 학술모임 이외의 장소에서는 강의를 안 하는 것을 원칙삼고 계신 분이셨기에 완강히 거절 의사를 표하셨는데도 어디서 솟아난 용감 덕분인지 선생님 한의원으로 이번 한 번만 강의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는 편지를 보냈고 기어이 학회에 모시고야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분명 예의에 어긋나고 동시에 억지스러운 일이었다. 그 땐 그저 등록비를 입금해가며 학회가 열리는 먼 곳까지 왕림해주시는 많은 한의사들에게 좋은 연사분들을 소개하는 것이 학술이사로서의 역할이라 생각했기에 암튼 그렇게 오버액션을 감행했었다.   


    ‘일의 감각’, 진정한 전문가 되기 위한 과정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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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때 그 강의를 맡아주셨던 한의계의 대선배님의 자제분이 한의전 졸업반이 되었고 이 인연으로 10년도 지난 그 때 그 일과 함께 선생님을 다시 떠올리게 되는구나 싶어서 그 학생에게 “아빠찬스라는 단어를 안 쓸 수 없네요. 아니, 아빠찬스보다는 아버님의 음덕으로 국회 실습을 허락하오니 성실하게 임하십시오”라고 당부해 두었다. 2주간은 환경노동위원회에 속해있는 의원실 실습으로, 그리고 남은 1주간은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한의사 선배들 몇 명을 만나는 것으로 간략하게 스케쥴도 짜보았다. 지난달에 짧게 부산을 방문했을 때 간략히 상견례처럼 얼굴만 확인한 터라 실습으로 두 학생들을 만나게 되면 어떤 이야기들을 들려줘야 할까? 또,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책은 없을까? 여러 생각들이 머릿 속에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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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다가 진정한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apprentice(견습생)-journeyman(제구실하는 장인)-master(고수)’라는 3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간략한 도해가 챕터를 나누는 책갈피처럼 반복적으로 인쇄되어 있는 『일의 감각』이라는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저자는 중증 외상환자를 수술하는 외과의사로 경력을 시작하여 현재 런던 임페리얼칼리지 소속 학자로 다양한 의사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였고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를 연구하는 데 매진 중인 로저 니본(Roger Kneebone)이다. 책의 제목만 보았을 때, 저자가 의사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장인이 되려면 더 넓은 목표를 바라보아야 한다. 수년간의 헌신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 일을 하는 좋은 이유가 있어야 한다. 전문가 되기는 그보다 더 위대한 목적이 따른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해야 한다. 관심이 핵심이다. 마주하는 대상이 누구든 무엇이든, 우리는 관심을 기울일 책임이 있다. 어떤 일을 하든 우리는 대상을 존중하고 살펴야 한다.” 

    “고수가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고수 되기란 인간으로 존재하기의 핵심이다. 우리가 많은 이가 알아봐 주는 고수가 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잘하고자 애쓴 일에 더 능숙해지는 것이 중요하다. 가치 있는 일에 시간을 투자하면 심오한 욕구가 충족된다. 우리가 우리보다 큰 무언가에 몰두하고픈 욕구다.”

    “고수가 되는 여정은 인간관계 같다. 계속 이어나가면 풍요로워질 잠재력이 생긴다. 굉장한 만족감을 주며 평생에 걸쳐 보답한다. 장기간 이어지는 관계가 그렇듯, 이 길에도 끝이 없다. 이 길은 우리의 성장과 변화를 받아안을 만큼 방대하고 유연하기에, 우리와 함께 성장하고 변화한다.” 



    의사 교육의 전문가이면서도 보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을 존중하는 입장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문장에서는 유독 장인 혹은 고수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위대한 목적과 넓은 목표 없이 무작정 오랜 시간 환자들만 많이 본다면 고수는커녕 그저 그런 밥값 겨우 해내는 숙련공에 머무른 채 경력을 마감하고 말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완성할 수 없다는 느낌이 고수되기의 중심에 있다. 완벽한 수술(치료)도, 완벽한 진찰(진단)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노력을 멈출 수 없다. 고수 되기란 그런 법이다”라며 로저 니본은 고수 되기를 포기하지 말라는 응원을 끝없이 반복한다.    


    고수로의 도약을 꿈꾸는 후학들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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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먼 앤 가펑클(Simon and Garfunkel)의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bridge over troubled water)』는 직역하면 “거친 바다 위 다리가 되어” 정도로 해석되어야 할 것 같은데, 무튼 1970년부터 5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따뜻한 가사와 잔잔한 보컬은 언제 들어도 평화로움이 느껴진다. 이 노래가 문득 떠오른 이유는 곧 진료실에서 만나게 될 제자들을 기다리는 설레임 덕분이다. 이 짧은 만남은 초소책방으로 이르는 길을 알려주신 그 어르신과의 만남처럼 훅 지나가 버릴 것이다. 길을 알려준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혹은 어딘가로 도달할 수 있는 다리가 되어주는 일이기도 하다. 나도 로저 니본의 언어를 빌어 그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고 싶다. “견습생에서 숙련공까지는 누구나 될 수 있습니다. 이제 막 시작점에 서 있는 그대들이니 무언가 더 큰 목표에 몰두하며 숙련공에서 고수로의 도약을 꿈꾸시고 꼭 이루어 내십시오. 그대들은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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