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혜 경희대학교 산단 연구원
(전 강동경희대한방병원 임상교수)
<선생님, 이제 그만 저 좀 포기해 주세요> 저자
[편집자 주] 본란에서는 한의사로서의 직분 수행과 더불어 한의약의 선한 영향력을 넓히고자 꾸준히 저술 활동을 하고 있는 김은혜 경희대 산단 연구원의 글을 소개한다.
갈비뼈 한 대 한 대가 보일 정도로 앙상한 남자가 휠체어를 타고 들어왔다. 두 다리는 꾹 누르면 움푹 파일 것처럼 퉁퉁 부어 있고, 마주친 샛노란 눈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뒤따라 들어온 여자는 그가 탄 휠체어를 붙들고 섰다. 눈에는 눈물이 고였고 긴장한 듯 눈빛이 흔들리지만 팔 한쪽에 끼워놓은 사전보다 더 두꺼운 갈색 서류 봉투만은 놓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선생님, 저희 남편 살 수 있죠?”
“의무기록지는 저기 앉아 있는 선생님 주시면 돼요.” 간호사 선생님의 말과 함께 나에게 건네진 갈색 봉투를 열어 안에 든 종이들을 꺼냈다. 빽빽이 적힌 내용, 그중 문구 하나가 눈에 띄었다.
‘기대 여명 1개월 이하’
문장의 끝에는 의사의 서명이 자그마하게 적혀 있었다. 두꺼운 서류들을 다 읽고 덮으니 어느새 보호자가 옆에 앉았다. “선생님, 저희 남편 살 수 있죠?”
여자의 뒤로 한숨을 쉬는 남자가 보였다. 나는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한 채, 온몸의 통증 때문인지 휠체어에 제대로 앉지 못하고 인상을 찡그리며 들썩거리는 환자를 먼저 병실로 보냈다. 그러고 나서 보호자에게 돌아와 의무기록지의 내용을―이미 아는 내용이겠지만―다시 읊어주었다.
보호자는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무언가 바라는 게 있는 듯이 나를 계속 바라보았다. 나는 그 눈빛을 애써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환자의 병실로 걸어갔다.
첫날밤은 여느 환자와 다를 바 없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허공을 바라보고 대화하는 환자와 그 옆에서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보호자의 모습. 신경안정제를 놓고 진통제를 늘리면서 보호자를 달래다 보면 환자는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이렇게 며칠을 반복하니 이따금 환자는 초점 없이 나를 쳐다보며 “저기요, 여기 병원인가요? 진통제 방금 들어갔어요?”라고 말을 걸었다. 긍정의 대답을 하자 환자는 내 가운을 훑고 보호자가 옆에 없는 걸 확인하고는 이어서 말을 꺼냈다.
“선생님, 이제 그만, 제발, 저 좀 포기해 주세요.” 심장이 바닥에 툭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너무 힘들어서 그러시는 거죠? 사모님 계시는데 잘 버티실 수 있어요. 더 도와드릴 수 있는 방법 찾아볼게요.”
겉으로 감정을 숨기고 애써 여상히 말했지만 환자의 대답은 같았다. “저 좀 포기해 주세요.”꽤 자주 원망의 말도 날아오곤 했다. 포기해 줄 수 있으면서 왜 안 해주냐, 왜 내 말은 아무도 안 들어 주냐, 누가 원해서 여기 있는 거냐, 당신이 뭔데 내 인생의 마지막을 휘두르려고 하냐…….
그렇게 3주 동안 같은 상황이 쳇바퀴처럼 반복되며 모두가 힘든 밤을 보냈다. 물론 나는 그를 포기하지 않았다.
“선생님 덕분에 편하게 있어요”
그날 밤도 보호자가 잠든 사이에 환자를 보러 조용히 병실로 갔다. 병실 창문 너머로 마주친 두 눈은 입원 이후 처음으로 또렷하게 초점을 맞추며 나를 쳐다보는 환자의 것이었다. 들어와도 된다는 손짓에 문을 열자 “이 늦은 시간에 또 오셨어요?”라는 인사말을 시작으로 상태를 묻는 의례적인 몇 가지 질문이 오갔다.
우리의 말소리만 두런두런 들리는 고요한 새벽 공기를 느끼다가 너무 늦은 밤 시간이라는 생각에 대화를 마치려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뒤에서 환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덕분에 편하게 있어요. 항상 감사하고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다시 돌아서자 처음 보는 청명한 눈동자와 시선이 맞춰졌다.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을 숨기며 “보호자분이 지금 모습 보면 좋아하실 텐데”라고 대답하자 환자는 “자는데요. 뭘”이라고 말하며 싱긋 웃었다. 이것이 그와의 마지막 대화였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임종 직전의 응급 상황에서는 몸도 가누지 못하고 오열하던 보호자는 사망 선고를 마치자 마음을 추스른 듯 내게 이야기했다. “정말 딱 한 달 채우고 가네요. 편한 얼굴로 가서 다행이에요. 그간 감사했습니다.”
몇 주의 시간이 지나고 보호자가 고맙다는 인사를 다시 하러 왔다며 케이크를 들고 찾아왔다. 이런 거 받으면 법을 어기는 거라고 마음만 받겠다하며 돌려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그가 몸부림치던 밤들이 떠올랐다.
포기해 달라는 말도, 편하게 해줘서 고맙다는 말도 다 진심이었을까?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포기해 달라는 말은 죽음 직전의 고통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갈수록 커지는 아내의 울음소리 때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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