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에서 느껴보는 醫藥文化 - 28

기사입력 2020.10.29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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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 밖으로 걸어 나간 조선 의료풍속도(醫療風俗圖)

    안상우 박사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사업단

     

    지난 9월 개최한 ‘2020 동의보감 국제 컨퍼런스’에서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주제들이 많이 발표되었다. 신문지상을 통해 발표 개요가 보도되었으니 새삼 다시 옮길 필요는 없을지라도 그 가운데 ‘잉글랜드 주요 도서관 소장 한의고문헌 조사’에 관한 발표는 서양에 조선의료풍속을 전하는 귀한 그림이 소개되어 있어 좀 더 부연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있어 보이기에 이 자리를 빌려 몇 자 적어보기로 했다.

    이번 발표는 사실 오래 전부터 기획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발표자인 김현구 선생은 공중보건한의사 신분으로 한의학연구원에 처음 발을 디딘 이후 필자가 주도한 문헌연구팀에서 수련을 하는 한편 경희대와의 대학원 학연협동과정에 진학해 의사학 전공으로 연구와 학업을 병행해 왔던 터였다. 

    이후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영국 옥스퍼드대로 유학길에 오르면서 의료인류학을 연구하고 있다. 이에 가끔씩 안부를 전해오던 차에 연구교류 차원에서 현지에 산재된 한국의학의 흔적이나 동의보감을 비롯한 조선의학문헌의 소재를 파악하고자 현지조사를 당부한 바 있었다. 


    해외 유명 도서관들 한의약 고문헌자료 등 다수 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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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연초부터 불어 닥친 코로나 감염증 대유행의 여파로 왕래가 두절되고 해외조사가 불가능해짐에 따라 이미 기획되었던 동의보감 국제컨퍼런스를 비롯한 각종 국내외 행사가 공전될 위기에 놓였다. 이에 이런 초유의 상황을 극복할 대안으로 고안했던 것이 해외에 체류 중인 한국인 연구자나 현지에서 활동하는 국내외 전문가를 섭외하여 화상발표를 위촉하는 방법이었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매우 제한적이고 번거로움이 뒤따르는 일이었지만 다행이도 상당수의 발표자들이 흔쾌히 응해주었고 이 조사 발표도 그 가운데 하나로 추천되었다. 아래는 본 발표의 요지를 간추린 것이다. 

    이번 발표에서 한의문헌자료를 수장한 기관으로 영국국립도서관(British Library), 케임브리지대 도서관 및 니덤연구소 도서관, 런던 동양·아프리카대학(SOAS) 도서관, 웰컴도서관(Wellcome Library), 옥스퍼드대 인류학박물관 등을 조사하였다. 이번 조사에서는 안타깝게도 현지 방역조치로 인해 대부분 실제조사가 어려워 매우 제한적인 정보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지만, 몇 가지 매우 소중한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

    우선 동의보감이나 제중신편과 같은 우리가 익히 아는 의서 말고도 16세기에 간행된 신편의학정전, 경사증류대전본초, 의림촬요와 같은 희귀의서와 동인십이경혈도, 의가비결(이상 영국국립도서관 자료), 조선판 의학입문, 방약합편, 보유신편과 각종 필사본류(이상 니덤연구소 도서관), 중국에서 간행된 동의보감(1763년)과 제중신편(1817년, 이상 SOAS 도서관)의 존재가 조사에 의해 드러났다. 이렇듯 해외에 산재되어 있는 문헌자료 이외에도 19세기 후반에 수집된 약 수저 추정품과 인삼 실물(이상 옥스퍼드대 박물관) 등이 의미 있는 유물이라 할 수 있다. 


    영국 웰컴도서관, 침 놓는 장면의 의료풍속화 소장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눈길을 끄는 것은 18세기 후반에 조선에서 그려진 그림으로 추정되는 의료풍속화 한 점이다. 다리를 다친 환자에게 침을 놓는 장면(화제: 病脚解針)을 그린 이 그림은 현재 런던에 소재한 웰컴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곳은 제약기업이 후원하여 설립한 전문적인 의학사박물관과 도서관을 운영하는 곳으로 세계의 전문가들에게 이미 오래 전부터 정평이 나있는 명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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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그림은 한의약 관련 소재를 다룬 조선풍속화라 우선 흥미를 갖고 접근하였는데, 이미지 속 도서(圖署)를 상세히 대조하여 판독한 결과 조선시대 말엽에 활동한 풍속화가 기산(箕山) 김준근(金俊根, 생몰년 미상)의 작품으로 판정할 수 있었다. 그는 19세기 개항기에 서양선교사나 유람객들을 상대로 활약하면서 「기산풍속도」 첩을 남겼고 우리나라 최초의 천로역정(「텬로력뎡」) 번역서에 삽화를 그리는 등 국내보다는 유럽에 주로 명성을 떨쳤던 화가이다. 하지만 화가 김준근의 생애와 이력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가 19세기 말 부산·원산 등의 개항지에서 풍속화를 그려 주로 서양인들에게 판매하였다는 사실만이 알려져 있다. 그가 그린 풍속화가 독일 베를린과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을 비롯해 프랑스 파리 기메박물관, 미국 스미소니언 기록보존소나 영국·덴마크·네덜란드·오스트리아·러시아·캐나다·일본 등 전 세계 유수 박물관에 1500여 점이 남아 있고, 당시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들의 각종 여행기에 삽화로 사용되면서, 조선의 풍속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오늘날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1884~1885년까지 조선에서 거주했던 칼스(W. R. Cales, 1848~1929)의 『조선풍물지(Life in Corea)』나 게일의 『텬로력뎡』(1895년 간행) 등에는 김준근의 그림이 삽화로 들어가 있어 매우 유명하다. 더욱이 책 서문에는 원산에서 제작했음을 기록하고 있으며, 전해지는 그림 중에 원산에서 제작했다고 밝힌 것이 많아 김준근이 주로 원산에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제작 연대가 확인된 김준근의 작품들을 통해 그가 1880년대부터 1890년대까지 대략 10여 년 동안 원산, 초량 등 개항장에서 활약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하며, 제작시기를 알 수 없는 그림들 역시 이 시기에 그려졌을 가능성이 크고 늦어도 1910년 이후로 하한연대가 내려가지 않는다고 한다.

    이러한 기산 풍속화의 특징은 농사와 누에치기나 베 짜는 모습, 혼례, 선비들이 기생과 노는 모습 등 18세기 풍속화에서 보이는 전통적인 주제의 그림이 다수 전한다. 이와 함께 19세기 말의 시대성을 반영하는 새로운 주제의 그림들이 등장하는데, 즉 수공으로 물건을 제작하고 물건을 파는 장면 등이 이전보다 종류나 수량 면에서 확대되고 형벌·제례·장례 장면 등 예전에는 찾아볼 수 없는 소재들이 등장한다. 

     기산풍속화는 민족지적 성격을 띠고 있어 당시 민족학이나 민속학에 흥미를 가진, 미지의 나라 조선의 풍속에 호기심을 갖고 알고자 하는 서양인들로부터 관심을 이끌었다고 알려져 있다(이상 민족문화대백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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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약 소재도 조선의 풍습과 함께 서양에 전파돼

    따라서 그가 개항기 전후로 조선의 풍습이나 문화를 지구반대편 서양에 알린 전파자로서 잘 알려져 있었지만 정작 의약에 관한 소재를 다룬 것은 보지 못했었는데, 이번에 처음 선보인 것이다. 필자 또한 오래 전부터 기산을 비롯한 풍속화 속에 그려진 조선시대 의약관련 풍모를 찾아보려 애써왔던 터였기에 더욱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림에는 갓을 쓴 장년의 의원이 두발을 질끈 동여맨 나이어린 총각의 다리에 침을 놓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버선발인 병자는 바지를 무릎 위로 걷어 왼쪽 다리를 드러낸 채 의원의 손길에 몸을 맡기고 있다. 이를 악물고 아픔을 참아내며 두려움을 이겨내려고 애쓰는 표정이다. 짐짓 의연한 척 하고 있지만 두 팔을 웅크리고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 외면하고 있는 모습에서 병자의 심리 상태를 읽어낼 수 있다.

     이에 비해 의원은 익숙한 투로 가벼운 손놀림을 보이며, 호침으로 족삼리혈 쯤으로 여겨지는 부위를 찔러 수기조작을 시행하고 있다. 약간 미소를 띠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언질이 주어졌음을 감지할 수 있다. 바닥에는 병자의 풀어헤친 버선 댓님이 놓여 있고 의원이 앉아있는 발치에는 침통으로 보이는 물건이 놓여있는데, 사혈침이나 절개도 같이 좀 더 크고 굵은 침이 삐죽이 머리를 내밀고 있다. 배경이 그려져 있지 않고 두 주인공만 확대된 이 그림을 통해 우리는 백수십 년 전 조선의원이 침 치료하는 시술현장에 가까이 다가선 듯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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