論으로 풀어보는 한국 한의학 (138)

기사입력 2018.06.08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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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金永錫의 濟衆立效方論
    “민중과 함께하는 의학을 만들어보자”

    kni-web

    金永錫(1079〜1166)은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儒醫의 한 사람이다. 그의 생애를 기술하고 있는 그의 묘지명에 다음과 같이 기술돼 있다.
    “김영석(金永錫: 1079〜1166)의 본관은 명주(溟洲: 지금의 강원도 강릉시)이다. 아버지는 배향공신(配饗功臣)이자 수대부 문하시중 판상서이형부사(守大傅 門下侍中 判尙書吏刑部事)인 인존(仁存)이고, 조부는 수대위 문하시랑평장사 판예병부사(守大尉 門下侍郞平章事 判禮兵部事)인 상기(上琦)이다. 어머니는 경원군부인 이씨(慶原郡夫人 李氏)이고, 외조는 수사공 경원군개국백(守司空 慶源郡開國伯)인 이호(李顥)이니 이자겸의 삼촌이다.

    처음 할아버지의 음서(蔭敍)로 양온승동정(良醞丞同正)이 되었다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판병부사(判兵部事)와 특진 수태위위(特進 守太衛尉)에 이르렀다. 네 차례 지방관직을 맡았고, 세 차례 동로병마사(東路兵馬使)가 되었으며, 한 차례 북로원수(北路元師)가 되었고, 한 차례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 1154년(의종 8)에 특진 수대위(特進 守大尉)에 임명되고 치사(致仕)하였으며, 집에서 있은지 13년이 지난 1166년(의종 20)에 향년 78세로 졸하였다.
    어려서부터 글을 잘 지었으며, 일찍 송(宋)과 신라(新羅)의 의서(醫書)를 열람하여 기요(奇要)한 것을 모아 『제중입효방(濟衆立效方)』이란 책을 만들어 세상에 유포하였다. 문하시중(門下侍中) 이공수(李公壽)의 딸과 결혼하여 4남 2녀를 두었다. 묘지는 내시 대부소경 태자문학(內侍 大府少卿 太子文學) 김거실(金居實)이 지었다.”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에서 재인용. 朝鮮總督府 編, 1976, 『朝鮮金石總覽』上, 亞細亞文化社)
    유학자로서 백성들을 잘 살게 해줄 방법을 강구하는 것은 학문적 목적을 실현시키는 방법론을 강구하는 것이 된다. 유학은 정치를 위한 학문이라고 하며, 정치의 목적은 세상을 바로잡아 모든 백성들이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유학자들이 이용후생을 실현시키기 위해 고심한 것은 직접적으로는 대민의료였고 간접적으로는 생활 속에서 활용될 수 있는 의학 지식의 보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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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 유학적 利用厚生의 원리를 실현하기 위해서 『濟衆立效方』을 저술한 김영석이 바로 여기에 해당하는 인물일 것이다. 김영석은 『濟衆立效方』이라는 醫書를 편찬하여 임상에 힘을 기울였는데, 이 책은 新羅와 宋나라의 醫書들을 참조하여 만든 것이다. 『鄕藥集成方』에 남아 있는 한 개의 조문으로 그 전모를 다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그 내용이 고려의 독자적 내용을 담아내고 있다. 그 내용은 “偏風手足不遂, 疼痛을 치료한다. 松葉 다섯말 정도에다가 소금 두되를 쪄서 뜨겁게 하여 푸댓자루에 담아 다림질해준다. 차가워지면 다시 쪄주어 병이 나을 때까지 한다”(『鄕藥集成方』風門, 中風半身不遂)이다.
    이러한 치료법이 唐代 王燾의 『外臺秘要』에도 비슷한 내용이 보이기는 하지만 『外臺秘要』의 경우에는 內服하는 것으로 되어 있고 『濟衆立效方』에서는 外用하는 것이기에 그 중국적 맥락이 아니라 한국적 맥락에서 치료법을 정리한 것이다.
    『濟衆立效方』의 ‘濟衆’은 ‘衆’ 즉 ‘민중’들을 ‘구제’(‘濟’)하기 위해 사용했을 때 곧바로 효과 나타나는(‘立效’) 처방(‘方’)들을 모은 책이라는 의미이다. 동로병마사를 세번 역임하고 북로원수를 한번 역임하면서 백성들의 신망이 두터웠던 것은 이러한 그의 의학적 능력과도 관련이 깊다.

    김남일 교수·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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