論으로 풀어보는 한국 한의학 (41)

기사입력 2014.04.30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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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權採의 鄕藥論

    權採(1399~1438)는 조선 전기 문신으로서 조선 전기 유학자 權近(1352~1409)의 조카이다. 1417년(태종 17)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해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는 1433년 유효통, 노중례, 박윤덕 등과 함께 『鄕藥集成方』을 편찬, 간행하면서 아래와 같은 서문을 적고 있다. 이 서문에는 그의 직함을 ‘通政大夫 成均館大司成 直 修文殿 知製敎 權採’라 적고 있다.

    “……무릇 백리마다 풍속이 같지 않고 천리마다 바람이 같지 아니하니, 포목의 생겨남도 각각 마땅한 바가 있어서 사람의 먹고 마심과 좋아하고 하고자 하는 바 또한 익숙한 것이 있다. 이에 옛 성인들이 온갖 약초의 맛을 보시고 사방의 성질에 따라 치료하신 것이다. 오직 우리나라는 하늘이 한 구역을 만들어주어 동쪽 땅에 웅거하였으니, 산과 바다에 보배로운 것들을 부여받았고 초목 약재들이 생산되어서 무릇 가히 백성의 생명을 기르고 백성의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것이 모두 갖추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예로부터 의학이 소홀히 여기어져 폐절되어 약물 채취에 때를 무시하였고 가까운 것을 소홀히 여기고 먼 곳에서 구하여 사람이 병이 들면 반드시 중국의 구하기 어려운 약들을 찾으니 이것은 어찌 칠년된 병에 삼년된 쑥을 찾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에 약을 얻을 수가 없어서 질병을 이미 어떻게 할 수 없게 된 것이라. 오직 민간에 사는 노인이 능히 한 개의 약초로 한 질병을 치료하지만 그 효과가 매우 신묘한 것이 어찌 땅의 성질과 잘 맞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약과 병이 잘 맞아 떨어져 그러한 것이다. 무릇 천리를 멀다 아니하고 무명지를 펼 것을 구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물며 나라를 벗어나지 않고서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자에 있어서랴. 사람이 알지 못함을 근심으로 여길 따름이다. …(중략)…그러나 方書 가운데 중국에서 나온 것은 여전히 적고 약물 이름 가운데 중국과 다른 것이 자못 많은 까닭에 그 의술을 업으로 삼는 자는 갖추지 못한 것을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삼가 오직 우리 주상전하께서 특별히 이에 마음을 두셔서 가려뽑은 의관들에게 명령하여 매번 사신을 쫓아 북경에 가게 하셔서 널리 방서를 구하게 하셨고 또한 이를 바탕을 거듭 태의원에 나아가셔서 약물 이름의 잘못된 점을 고찰하여 바로잡을 것을 주청하셨다. …(중략)… 다시 나 權採에게 서문을 쓰도록 명하셨으니, 내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임금의 도는 仁보다 큰 것이 없는데, 仁道는 지극히 커서 또한 거의 여러 가지이다. 지금 우리 주상전하께서 큰 덕으로 지극한 정치를 일으켜 자신의 자리에서 政事를 발하셔서 온전히 이 도의 큰 것을 몸으로 실천하셨고, 醫藥과 같은 濟民의 일에도 이와 같이 매진하시니, 가히 어진 정치의 本末이 크거나 미세한 것이 모두 다 발휘되어 남음이 없음을 봄이라. 또한 옛 임금들이 혹 몸소 스스로 약물을 제조하거나 혹 수염을 깍아서 약물에 섞어 한 사람에게 혜택이 배풀어진 경우가 후세에 여전히 칭송되고 있지만, 어찌 醫書를 편수하여 方論을 널리 보여서 만백성들에게 혜택을 주고 만세에 혜택을 베푸는 것만 같겠는가. 그 베푸는 규모가 매우 큼이라.…(하략)”

    『鄕藥集成方』을 간행하면서 쓴 서문을 통해 權採는 중국의학의 영향력을 벗어나 독립적 의학의 체계를 지향하기 위해 이 책이 만들어졌다고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여기에는 한반도 지역에 맞는 독자적 의학이론의 개발, 한국인에 맞는 약재의 발굴, 동아시아 의학의 통일적 발전을 위한 노력 등을 같이 고려하여, 인본주의를 지향하는 유교 국가로서 면모를 만들어내는데에 鄕藥論이 중요한 이론적 배경이 된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이다.

    <- 권채의 서문이 나오는 ‘향약집성방’ 고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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