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의 세계화 그리고 나 上

기사입력 2007.03.09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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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醫文化 연구회 소속(cafe.daum.net/mommam21)
    세계 醫文化 학술기행단 신 동 진(서울 강서구 신동진한의원)
    얼마 전 한·미 FTA 한의사시장 개방 반대 집회가 과천에서 있었다. 많은 한의사가 모여 미국 침구사에게 한국의 한의사시장을 개방할 수 없음을 강력히 표명하였다. ‘실력으로 승부하라’는 질타의 글들은 그 시간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집회에 참석했던 많은 한의사들은 그 사건 이후로 어떤 생각을 갖게 되었을까. 어떤 고민을 하고 있을까. ‘세계화’라는 숙제가 여전히 한의학계에 남아있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고 있을까….

    대한한의사협회가 세계화와 시장 개방에 대한 합리적인 청사진을 마련하고 있겠지만, 맘이 조급했던 나는 ‘醫文化 연구회’와 함께 ‘세계 醫文化 학술기행단’을 조직하고 세계로 눈을 돌려 보고자 하였다.

    ‘醫文化 연구회’는 아주대학교 의과대학의 인문사회의학 교실이 주축이 된 학술모임이다. 서양의 고대의학에 관심이 많았던 차에 ‘한국 醫文化의 세계화’ 필요성을 역설하시는 이종찬 교수를 만나게 되었고, 그 만남 이후 나는 ‘醫文化 연구회’를 통하여 이전에 접하지 못한 많은 사실들을 알 수 있었다. ‘한국 醫文化의 세계화’에 대한 고민뿐만 아니라 기존 한국 醫文化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醫文化 창조에 대한 고민 등을 함께 나누고 어느 정도 방향을 설정할 수 있었다. 이렇듯 ‘세계 醫文化 학술기행단’의 출범 배경에는 한 한의사의 ‘세계화’에 대한 고민이 자리하고 있었다. ‘세계 醫文化 학술기행단’의 첫 관문은 일본이었다. ‘일본 근대의학의 기원을 찾아서’라는 주제 아래 나가사키, 오사카, 교토, 도쿄를 연결하는 일본의 근대화·세계화의 축을 살펴보기로 하였다.

    일본이나 조선이나 똑같이 외세에 대해 강력한 쇄국정책을 폈지만, 그 내면의 모습은 전혀 달랐고, 결과적으로 일본은 세계화·근대화에 성공한 반면, 조선은 실패하였다. 내재적 근대화론자의 가정을 따르더라도, 다시 말해 갑오개혁 이후 조선이 자주적으로 근대화 되었다고 해도, 조선은 후발 주자일 수밖에 없었고 그 수준은 일본에 미칠 수 없었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은 단지 10여년 간의 일이었고, 일본의 쇄국기간은 무려 240여년이나 되었는데도 이러한 차이가 발생한 원인이 무엇일까. 오히려 일본의 쇄국기간이었던 17, 18세기에 조선은 외국과의 교류의 길이 열려 있었는데 왜 눈과 귀를 열고 외국을 보지 못했을까. 17세기에 일본 나가사키를 향하던 네덜란드 선원 하멜과 그 일행이 태풍을 만나 제주도에 표류했을 때, 그를 심문한 한양의 조정대신들은 왜 그를 통해 네덜란드를 알고자 하지 않았을까. 이러한 역사적 궁금증들은 일본으로 향하는 나를 더욱 설레게 하였다.

    사진은 ‘세계 醫文化 학술기행단’의 첫 목적지인 나가사키의 데지마(出島)이다. 이곳은 쇄국정책 하의 일본에서 유일하게 네덜란드와 교역이 허락된 곳이었다. 공식적으로는 쇄국정책을 쓰면서, 일본은 유럽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자 했고, 선교활동 없이 무역만 하겠다는 네덜란드는 이 시기 일본의 근대화·세계화의 훌륭한 파트너가 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의 조선은 일본이 외국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해선 관심이 없었다. 제주도에 표류한 하멜을 통해 일본과 네덜란드가 나가사키에서 무역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나가사키에서 벌어지고 있는 외국과의 교류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

    당시의 조선은 일본에 대하여 문화적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었고,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는 조선의 위정자들은 중국이라는 프리즘만을 통해서 외국을 바라보고자 했다. 조선통신사의 이동경로를 보더라도, 그 이동경로에 규슈 서쪽의 나가사키는 없었다. 조선은 일본이 외국과 어떻게 교류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증거이다. 아쉽게도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예의가 없는 야만인쯤으로 생각하고 우쭐해 하던 바로 그 때에, 그 야만인들의 리더는 데지마(出島)를 통해 서양의 문물을 매우 빠른 속도로 받아들이며, 세계화에 대한 충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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