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의 세계화는 학문적 기반 조성과 연구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현대과학과의 조화와 협력을 하더라도 한의학적 원리를 충실히 반영하는 학문발전이 중요합니다.”
최근 한의학의 과학화를 주장하는 경향을 지켜보면서 한의학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과학화는 과학화가 아니라 ‘과학을 빙자한 도태로 가는 길’이라고 말하는 제13대 한의협 한요욱 명예회장(1974.4~1976.3).
그는 무엇보다 양의학계에서 주장하는 한의학 경시 풍조에 경계심을 늦추지 말 것을 주문하다. 의학은 국민을 위한 의료가 되어야 하며 어느 직능의 전유물일 수 없다는 그는 진정한 학문은 자신의 정체성을 갖고 존립할 때 의미가 있다고 덧붙인다.
때문에 학문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한 어떠한 발전책도 기대할 수 없다는 그는 상호 존중 속에 협력과 공조체계를 구축할 때 비로소 진정한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강조한다.
한 회장이 이처럼 학문 존중과 기반조성 필요성은 재임 시절 회무 전반에서 엿보게 한다.
74년 2월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가스에서 열린 제4차 세계침구학술대회에 참가해 국제동양의학회학술대회(ICOM) 창립선언이 그것이다.
평소 한국 한의학의 국제학술대회 필요성을 강조해왔던 그로서는 전세계 동양의학자들이 참가한 이점을 활용해 대회종료 직전 국제동양의학학술대회 창립 취지를 선언했다.
당시 낭독문에는 세계침구학술대회 명칭을 국제동양의학회로 개명하고, 사무총국을 대한민국에 설치 운영할 것, 그리고 제1차 대회는 대한민국에서 개최하되 사무총장은 대한한의사협회장이 겸임토록 한다는 사항을 결의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매년 성장을 거듭해 지난해 대만에 이어 내년 한국에서 열릴 예정인 13차 국제동양의학회의가 될 때까지 ‘커가는 아이를 지켜보는 심정’ 처럼 그의 감회가 남달랐다.
국제동양의학회가 이제는 한국 한의학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대표기구로서 역할 뿐 아니라 학술적으로도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사실에 고무된 듯하다.
“이제 ICOM도 학문적 성숙과 회원들을 더 많이 참여시키도록 하는 노력들이 필요합니다. 양적 성장과 함께 질적 성장도 도모해야 할 때가 된 셈입니다.”
이같은 한 회장의 학문 중시는 국내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74년에는 제1회 전국한의학학술대회를 매년 10월에 개최하도록 처음 길을 연 것이다. 현재는 회원들의 숫적 증가로 권역별로 진행되고 있지만 전 회원들을 학술대회로 이끌어내는데 모태역할을 한 것이다.
또한 학문적 발전과 회원들의 학술분위기 조성을 위해 학술지가 중요하다고 보고 ‘한방토요회’를 73년 9월 30일 창간, 이종형 당시 학술이사를 중심으로 추진하기도 했다. 비록 학술지는 몇 년동안 발간되다 중단되긴 했지만 변변한 학술지가 없던 시절 한의계에 미친 파장은 만만치 않았다.
“어느 때나 마찬가지였겠지만 제가 재임하던 시절에도 많은 의권문제는 한의계를 괴롭혔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심각한 문제는 약사, 침구사, 무면허 의료업자 등 유사의료업자들의 횡포였어요.”
회장 취임과 함께 잘 나가던 한의원을 임기 2년 동안 폐업하고 의권옹호 비상대책위원회를 급히 결성, 보사부나 국회를 불철주야 뛰어다닌 것도 이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도 ‘지독하다는 생각마저 든다’는 그는 심지어 맹인들이 한의원을 몰려온다는 제보를 미리 알아 피하고, 경찰들이 해산시키는 등 수난도 겪었다.
‘독한’ 노력 때문인지 약국의 한약장 철거는 눈에 띄게 줄었고, 유사의료업자도 표면상 자취를 감추었다.
한 회장은 고재필 장관시절, 75년 8월 20일 자로 대통령령 제7746호 보건사회복지부 의정국 내 한방전담과 의정 3과가 설치 공포가 가장 기억에 남는 일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제대로 꿈도 펴보지 못하고 81년 11월 20일 대통령령으로 폐기되는 안타까움을 남겼을 때 기대만큼 실망감 또한 이만저만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이 모태가 되어 어엿하게 자리잡은 한방정책관실을 바라보면 위안을 삼는다고 했다.
또 75년 12월 17일 제94회 정기국회에서 약사법 중 개정 법률안인 약사의 한약임의조제권을 불인정한다는 부대결의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켜 75년 12월 31일자로 대통령령 법률로서 정식 공포된 것도 나름대로 의미있는 기억으로 떠올린다.
이와 함께 76년 3월 24일에는 보건복지부 예규로 보건사회부장관 소속하에 동양의학발전 육성협의회를 설치 시행할 것을 공포했으나 이 협의회도 2~3년도 못가 폐지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이처럼 정부의 한의약 관련 발전책이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아 사라지는 부침이 반복되면서 그로서는 많은 것을 생각케 했다.
“빼앗기다 보면 계속 빼앗겨 온 것이 한의계였습니다. 정부당국의 의지도 문제였지만 한의계 대응 소흘도 책임에서 벗어날 순 없지요.”
66년 한의협 이사로 첫 발을 내딛은 한회장은 주변의 권유에 못이겨 72년 서울시 8대회장으로 본격 회무에 꾸준히 관여해 왔다. 그 후 74년 협회장을 역임하면서 ‘부정을 보고 지나치지 말고 남속이지 말며, 약자 편에서 서서 돕는다’는 평소 원칙을 실천해왔다며 웃는다.
“인생은 한번 살고 가면 그만이고, 그래서 비겁한 행동은 하지 말자고 다짐하며 살아왔죠.”
현재 수원지방법원 부장판사를 둔 아들과 4명의 딸들을 모두 출가시키고 홀로 한의원에서 지키고 있는 한회장은 11전 전 고생만 하다 타계한 부인을 가장 그리워한다.
스트레스 받지 않으려고 무슨 일이 생겨도 ‘그럴 수 있지’로 지나친다는 한회장. 한의계에 “머리 좋은 후학들이 많이 나오고 회원들 간에 단합이 잘 되는 것 같아 기쁘기도 하지만 한의학 연구와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고 말도 잊지 않는다.
“의사로서 항상 국민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그는 “진정한 의학은 국민들을 질병의 고통에서 해방될 때 완성될 수 있다”며 후학들이 의사 본분을 지켜줄 것을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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