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일의 儒醫列傳 82

기사입력 2007.11.09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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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朝鮮醫學의 結實을 내놓은 儒醫

    철종 때부터 고종 때에 이르기까지 서울 무교동에서 의원을 경영하면서 명성을 떨쳤던 黃度淵은 韓國醫學史에서 중요하게 꼽는 儒醫 중의 하나이다.

    1885년에는 ‘附方便覽’, 1868년에는 ‘醫宗損益’과 ‘醫宗損益附餘’, 그 다음해에는 ‘醫方活套’를 간행하는 등 朝鮮後期 儒醫 가운데 가장 활발한 저술활동을 벌였다. 특히, ‘醫宗損益附餘’의 藥性歌를 七言二句 14字로 축소한 것을 ‘損益本草’라고 부르기도 한다.

    황도연은 77세가 된 1884년에 그의 아들 黃泌秀에게 명하여 왕인암의 ‘本草備要’, ‘醫方集解’를 合編한 法을 모방하여 ‘醫方活套’와 ‘損益本草’를 합하고 다시 여기에 ‘用藥綱領’과 ‘救急’, ‘禁忌’ 등 10여종을 보충하여 ‘方藥合編’이라는 서적을 편술하도록 하였다. 이 책은 그가 죽은 후에 출간되어 세상에서 빛을 발하게 되었다. 이 책은 특히 조선 말기 韓國의 韓醫學을 대표하는 대표적 서적으로 이름이 높다.

    黃度淵의 의학사상을 몇 가지로 집약한다면, 먼저 때에 맞는 처방을 선별하여 사용에 적합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東醫寶鑑’의 처방을 집약해나가는 과정에서 깨달은 것이다. 다음으로, 여러 서적에서 진수가 되는 내용을 취합하여 요체가 되는 것들만을 모았다. 황도연이 ‘東醫寶鑑’에 나오는 내용뿐 아니라 ‘本草針線’, ‘萬病回春’, ‘景岳全書’ 등 제반 서적들에 보이는 중요내용들을 섭렵하여 실용성에 바탕하여 요점을 간추린 것이 바로 이러한 예이다. 마지막으로 이론 가운데 핵심이 되는 것을 잘 선별하여 실제 임상과 연결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러한 자세로 인하여 후대인은 黃度淵이 한국의 韓醫學을 經驗方을 위주로 한 對證治療에 경도되게 하여 理論을 輕視하는 방향으로 이끌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이것은 黃度淵의 작업이 가능할 수 있었던 朝鮮醫學의 역량을 過小評價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그의 저술 ‘方藥合編’은 ‘東醫寶鑑’이 나온 이후 충분히 무르익은 朝鮮 後期 醫學의 결실이며, 民族醫學의 결실이며, 世界醫學의 결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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