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康命吉은 조선 문화의 황금기인 영조와 정조년간에 御醫로 활동하면서 뛰어난 의술로 당대 최고의 의사로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 영조 44년인 1768년에 의과고시에 합격하여 내의원에 들어온 후에 정조대까지 의술과 학식으로 이름을 떨쳤고 이러한 능력을 인정받아 1794년에는 首醫의 위치까지 오르게 되었다. 종1품인 崇祿大夫까지 오르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와 같이 높은 자리에까지 올라가게 된 데에는 그의 깊은 학식과 인격을 정조가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康命吉은 1799년 왕명에 따라 ‘濟衆新編’이라는 의서를 간행하는데, 이 책은 ‘東醫寶鑑’의 단점을 극복하고 활용도가 높은 의서를 만들고자 하는 정조대왕의 의지의 반영으로서 康命吉은 이를 잘 수행해냈다. 일명 “芟繁補漏” 즉 “번잡한 것을 베어내고 빠진 것을 보충한다”는 이 책의 편집방침은 이러한 목표에서 설정된 것이었다. 지창영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芟繁’에 대해서는 경락학적인 부분, 질병서술의 부분, 진단의 부분, 질병의 분류, 유사한 증상, 병리기전에 대한 부분, 운기적인 내용의 측면에서 이루어졌고, ‘補漏’에 대해서는 ‘東醫寶鑑’의 내용에 대한 補漏, ‘東醫寶鑑’에서 잘못 인용하고 있는 문장을 바로 잡음, 약물의 가감, 外症·自覺症狀·時間에 따른 疾病의 間甚, 常病中에 ‘東醫寶鑑’에서 빠진 부분 등의 측면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외에도 새로운 醫論을 新增하였고, 老人處方과 藥性歌를 첨부하고 있다.
이렇듯 한의학사에 남는 명저를 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개인적으로 정조의 죽음 이후에 비참한 종말을 고하게 되고 말았다. 순조가 즉위한 후에 정조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덮어쓰고 죽게 된 것이다. 정조와 친하게 지냈던 이력을 볼 때, 이것은 반대파의 숙청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