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醫易의 이치에 밝았던 조선 중기의 儒醫
易學의 이치는 자연의 변화에 대한 자연과학적 지식을 전달해 주기 때문에 예로부터 醫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인식되어져 왔다. 대부분의 醫學者들은 易學에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어서 자신의 理論을 易學으로 풀이하여 설명하고 있다.
中國 金元時代의 四大家인 劉完素, 張從正, 李, 朱震亨 등은 역사에 남는 의학적 업적을 내었지만, 그들의 사상적 바탕인 易學에 대한 연구가 없었다면 이러한 업적들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조선시대는 性理學이 성행했던 시대로, 이 가운데 특히 易學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였다. 한국 역사상 易學에 조예가 깊으면서 醫學에 뛰어났던 인물로 金時習, 李滉, 許浚, 尹東里, 柳成龍, 徐命膺, 曺倬, 李濟馬, 李奎晙, 韓東錫, 朴仁圭 등이 있다. 이들은 易學을 연구하면서 이를 醫學에 적용시키려고 노력을 하였거나, 반대로 醫學을 연구하면서 易學을 끌어서 설명하는데 활용하고자 노력하기도 하였다.
조선 중기에 易學에 뛰어난 인물로 꼽히는 裵龍吉은 醫學과 易學 두 방면에서 정평이 난 儒學者였다. 그는 金誠一의 문하에서 수학한 후에 柳成龍, 趙穆, 南致利 등에게서 師事하여 자신의 학문적 계통을 이어갔다. 이러한 학문적 수련과정에서 天文, 地理, 律曆, 兵典, 醫藥, 易學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어지게 되었는데, 특히 醫學과 易學으로 이름이 나게 되었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에는 의병대장으로 일본을 상대로 목숨을 건 전쟁에 뛰어들었고, 1597년 정유재란이 났을 때는 和議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의 문집으로 ‘琴易堂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