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일의 儒醫列傳 76

기사입력 2007.09.07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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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용주의적 醫學論을 외친 亂世의 儒醫

    호가 遲川인 崔鳴吉은 명분에 사로잡혀 백성들을 고통에 빠뜨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철학으로 당시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를 제대로 꿰뚫어 본 몇 안되는 인물 중의 하나이다.

    李恒福과 申欽의 제자로서 1602년 10대의 나이에 증광문과에 합격한 후에 승문원을 거쳐 성균관전적이 되었다. 광해군 때 파직된 후 趙翼, 張維, 李時白 등과 교류하면서 陽明學에 몰두하여 특유의 실용적 사상을 정립하였다. 인조반정에 참여하면서부터는 국정에 직접 참여하면서 당시 국제정세에 대한 실용적 방안을 제시하는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崔鳴吉은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633년에 ‘鄕藥集成方’의 간행에 직접 관여하여 이의 출판에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는데, 이것은 그의 실용적 유비무환의 정신의 발로였다. 그는 이 당시에 內醫院의 都提調였다. 內醫院의 都提調는 중신 가운데 의학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 겸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崔鳴吉이 이 관직에 있었던 것은 그가 출중한 의학지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鄕藥集成方’의 跋文에서 당시 중국의 의약이 횡행하는 풍조를 개탄하면서 민족전통의학의 부활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세종 때 간행된 이후에 이리저리 흩어져 완본을 구하기 어려운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수소문하여 제주도에서 완본을 확보하여 출간하였다. 전운이 감도는 시기에 백성들에게 질병치료에 대한 유용한 지식을 전달할 醫書의 출간이 절실하다는 시대적 필요성에 부응하기 위한 것도 중요한 출간 배경이다.

    이렇듯 崔鳴吉의 실용주의적 의학론은 한의학을 음해하려고 노력하는 집단들의 광풍 속에서 생존권을 외치고 있는 현 한의계에 귀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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