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친 조선 중기의 儒醫
尹知微는 조선 중기에 활동한 의사로서 중국에까지 알려진 인물이다. 1591년에 의과에 등제하여 의사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 후에 1612년부터 通訓大夫, 內醫院直長, 副參軍, 醫書印出監校官 등을 역임했다. 그가 중국에까지 알려지게 된 데에는 赴京使에 수행의사로 참여하여 명나라에 가서 명나라의 儒醫 王應린과 醫事問答을 하면서부터다. 명나라의 王應린은 그 내용을 그의 저서 ‘王應 린雜集’에 수록하여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는데, 그 내용 가운데 의학문답에 관한 내용만 抄出하여 일본에서 1716년에 ‘答朝鮮醫問’이라는 제목의 의서를 간행하게 되었다.
이 책은 北京中醫藥大學 醫史文獻敎室 主任 梁永宣敎授가 韓國韓醫學硏究院의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일본에 산재해 있는 한국 관련 의서를 조사하는 과정에 발견되어 그 실체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梁永宣敎授의 연구에 의하면 ‘答朝鮮醫問’에 나오는 내용을 살펴볼 때 尹知微와 王應린이 직접 얼굴을 맞대고 한 문답이 아니라 尹知微가 서면으로 질문을 하면 王應린 이 서면으로 대답하는 형식의 서면문답이었다.
王應린이 인용하고 있는 醫書로 ‘黃帝內經’, ‘靈樞’, ‘難經’, ‘外丹經’ 등이 있었고, 醫家로는 張仲景, 巢元方, 王太부 , 成無己, 李東垣, 朱丹溪, 戴元禮, 薛立齋 등이었다. 尹知微의 질문은 “小便不利何藥療之”, “咳嗽日久不愈何治”, “水腫鼓脹治法”, “頭痛頭風有何妙法”, “痔漏當何法治之”, “凡人無子, 調治婦人而不能取效云何” 등이었다고 한다. 이렇듯 尹知微는 조선과 명나라간의 의학 교류를 통해 양국간의 우의를 다지는데 일조하였다. 이외에도 그는 李希憲과 함께 ‘東醫寶鑑’, ‘纂圖脈’, ‘新撰 벽瘟方’, ‘벽疫神方’ 등의 監校官이 되어 편찬에 참여하여 醫書의 간행에 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