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宰相으로서 ‘醫學入門’인쇄를 독려한 儒醫
‘醫學入門’은 조선 후기 우리나라 儒醫들이 많이 읽고 활용했던 醫書이다. 유학적 학풍에 흠뻑 젖어서 살았던 조선 후기 儒醫들의 입장에서 성리학적 학문체계가 바탕에 깔려 있는 ‘醫學入門’은 당시 학문코드와 확실히 맞아 떨어지는 것이었다.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名宰相이었던 柳成龍이 이 책을 바탕으로 대민의료에 나서서 후에 ‘鍼灸要訣’같은 책을 쓴 것도 이러한 흐름과 관련이 깊다.
金履喬는 조선 말기에 활동했던 재상 출신 儒醫로서 의학에 조예가 깊었기 때문에 內醫院都提調를 역임하면서 의학 발전에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는 1789년에 문과에 급제한 다음에 여러 관직을 거쳐 승진하면서 정치의 일선에 나서게 되었다.
그는 1800년 순조가 즉위한 다음에 僻派에 의해 함북 明川에 유배되는 비운을 맛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1806년에 복권되어 1810년과 1811년 연이어 통신사로 대마도를 다녀오면서 외교관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醫學入門’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820년 전후한 시기이다. 성균관대사성, 사헌부대사헌, 도승지, 한성부판윤, 이조판서, 평안도관찰사, 병조판서, 형조판서, 공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면서 醫書編纂의 필요성을 공감하여 ‘醫學入門’ 편찬에 나선 것이다. 그가 1820년에 쓴 ‘醫學入門’ 跋文에서 그가 당시 새로운 의서의 판각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醫書의 板刻이 옛날에는 많았는데, 지금은 별로 없다. 醫道도 또한 이에 따라 약간 衰退하였다.” 그의 노력에 의해 만들어진 ‘醫學入門’ 판본은 현재 한국에서 널리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200년 가까이 흐른 지금 ‘醫學入門’을 읽을 때마다 한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