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醫學에 뛰어난 자주적 史學者
조선이 개국한 후에 文風이 일어나게 된 데에는 국가적 장려책에 힘입은 바가 크기도 하지만 국민 전체의 학문적 역량이 높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뛰어난 인재를 제대로 발탁하여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것도 중요하다 할 것인데, 이에 기여한 인물이 있었으니 徐居正이 바로 그이다.
서거정은 1444년(세종 26)에 문과에 급제하고 사재감직장을 거쳐 集賢殿 博士, 부수찬, 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1460년에는 명나라에 가서 문장과 시로써 이름을 떨치기도 하였다.
그는 뛰어난 학문적 능력으로 ‘東國通鑑’, ‘東國輿地勝覽’, ‘經國大典’ 같은 국가적 학술사업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시문에도 뛰어나 ‘東人詩話’, ‘東文選’ 등 신라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 이 땅에서 쓰인 詩文을 정리하기도 하였다.
徐居正은 매우 자주적인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筆苑雜記’, ‘三國史節要’, ‘東國輿地勝覽’, ‘東國通鑑’등 그의 손을 거친 역사서 속에는 중국에 대한 자주적 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성리학뿐만 아니라 천문, 지리, 의학 등에도 뛰어났다. 특히, 의학에 대한 깊은 이해력은 제왕들에게 인지되어 세조 때는 ‘鄕藥集成方’의 국역, ‘山居四要’의 교정, ‘馬醫方’의 집필 등의 의학적 작업에 참여하였다.
이렇듯 조선 초기 국가 정비 사업에 45년간 여섯 왕을 섬겨가면서 동참한 徐居正은 醫學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이것은 의학이 지식인의 필수과목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