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범한의계적 독서문화 부흥 운동에 나서자
다독·다작·다상량은 좋은 글 쓰기 조건
한의사·한의대생 독서·작문량 반성 필요
얼마전 한 의학전문대학원에서 벌어진 일이다. 과목의 첫 시간에 글쓰기에 대해 강의하는 교수에게, 대학원생이 이런 항의를 하였다. “교수님, 저는 글쓰기를 배우려고 여기 온 게 아닙니다.”
교수는 그 학생에게 ‘글쓰기’의 중요성을 미국 MIT 공대의 예를 들며 강조하였다. 아무리 실험을 잘하고 똑똑한 학생이라도 ‘글쓰기’ 과목을 통과하지 못하면 MIT를 졸업하지 못한다.
의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글쓰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은 구양수(歐陽修)의 삼다(三多)를 이야기하고 싶어서다. 송나라 문장가인 구양수는 다독(多讀)·다작(多作)·다상량(多商量)을 좋은 글을 쓰기 위한 조건으로 말하였다. 아마도 동서고금이 모두 동의하는 바라 생각한다. 구양수는 읽기만 하거나 생각만 해서는 결코 글쓰기가 완성될 수 없음을 오래전 지적했고, 이것은 학문의 세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세계의 유수한 대학들은 이미 학생 교육과정에 그것을 모두 반영하고 있다. 그들 대학 도서관에는 석사급 이상의 전문사서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학생들의 독서를 돕고 있다. ‘인문학의 죽음’을 선언한 고대 인문학부 교수들에게 ‘자성의 목소리’를 요구한 사람들은 ‘글쓰기’와 ‘글읽기’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대학교육의 책임을 그들에게 묻고자 하였다.
한국의 학문적 수준은 이것만으로도 판단 가능하다. 며칠 전부터 조선일보와 매일경제신문이 독서문화를 부흥시키고자 특집기사를 연재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일에 그들이 사운을 걸었다고 생각한다. 독서문화의 퇴보, 그것은 출판문화의 붕괴이고, 신문도 예외일 수 없기 때문이다.
안티팬들만큼이나 골수팬이 많은 조선일보는 보다 적극적으로 행동하여 거실을 서재로 바꿔주는 행사까지 벌이고 있다. 조선일보의 독실한 안티팬이라도 이 점에선 박수를 쳐줘야 한다. 대한제국 말기를 기준으로 한국과 일본의 당시 도서관 수는 가히 천문학적 차이가 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몇 만 대 1... 오늘날의 미국을 만든 것은 미사일이 아니라 도서관이었다고 매일경제는 지적한다. 과연 우리 한의과대학의 도서관 수준은 어떤가. 한의대생과 한의사의 독서량과 작문량은 어떤가. 바야흐로 한의신문과 대한한의사협회도 범한의계적으로 독서문화 부흥에 동참할 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