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일의 儒醫列傳 52

기사입력 2007.03.02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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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醫學 硏究를 帝王의 德目으로 여긴 儒醫

    조선 후기의 개혁파를 등에 업고 재위기간 많은 치적을 쌓았던 정조의 죽음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의문들이 있다. 이인화라는 작가에 의해 씌여진 ‘영원한 제국’이라는 소설로도 유명한 정조에 대한 죽음의 이야기는 안성기가 주연한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정조가 의학에 뛰어난 능력이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부터 독살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의학에 대한 지식을 축적해 예비하기 위해서였다는 주장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이다.
    그의 저술을 모아 놓은 184권에 달하는 ‘弘齋全書’(1814년에 간행)에는 ‘壽民妙詮’이라는 醫書가 포함되어 있다. 이 책의 서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의학은 백성들을 구제하는 것이므로, 양친을 모시는 자라면 의학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의학이 어찌 천한 것이겠는가? 우리 조선의 풍속이 의학에 종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이것이 어찌 儒學을 숭상하는 사람이 할 일이겠는가? 醫學도 儒術의 일단이다. 내가 어릴 때부터 의학을 연구하여 병술년(1766년: 15세 무렵)부터 병인년(1776년: 25세 무렵)에 이르기까지 선대왕(영조를 말함)의 병환을 옆에서 돌보기 위해서 띠를 풀지 않았던 10년 동안 脈訣, 藥性에 방통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사람의 품부받음이 옛과 지금이 다르고 동서의 풍토가 같지 않다. 고금의 醫書들 중에 우리나라에 적합한 것은 오직 陽平郡 許浚의 ‘東醫寶鑑’이다. 그러나 그 이치를 논하고 처방을 논함이 서로 얽혀서 체계가 정리되어 있지 못하다. 내가 이를 조금 고치어 그 정화로운 내용들을 모았고 또 湯液, 各方으로 별도로 續編을 만들어 ‘壽民妙詮’이라고 이름 붙였다.”

    1800년 6월14일부터 28일까지의 조선왕조실록 기록은 정조의 질병과 치료에 대한 많은 내용들을 담고 있다. 정조는 등창으로 고생하였고, 이를 치료하기 위해 가감소요산, 백호탕 등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자신의 질병을 實熱로 보는 이러한 주장은 虛熱로 여기는 御醫들의 견해와 상충하는 것으로서 끝내는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고 연훈방이라는 검증되지 않은 치료법을 사용하여 죽게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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