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일의 儒醫列傳 50

기사입력 2007.02.09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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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뛰어난 의술로 가문의 영광을 이루어낸 儒醫

    역사상 형제가 모두 의원으로 활약하여 당대에 가문의 이름을 떨친 경우가 있다. 바로 楊弘達과 楊弘迪 형제이다. 이 중에 형인 楊弘達은 태조, 정종, 태종 3대에 걸쳐 35년간 典醫로 활동하면서 의사로 이름을 떨쳤다. 그는 여러차례 인생의 역경을 겪기도 하였지만, 그 때마다 주위의 도움으로 이를 극복하고 관직이 2품인 검교승녕부윤에 이르게 되었다. 1397년(태조6년)에 왕의 질병에 신속히 입궐하지 않았다는 죄명으로 축산에 유배되기도 하였고, 1405년에는 賤女의 소생이라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한때 해직되기도 하였다. 또한 1417년에는 왕의 병환을 치료하면서 제대로 여쭈어보지 않았다는 명목으로 門外黜送 당하기도 하였다. 1418년 성녕대군의 질환을 오진하여 죽게했다고 하여 庶人으로 폐할 것을 刑曹에서 여러차례 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太宗이 이를 만류하여 위기를 넘기기도 하였다.

    이렇듯 여러 역경을 겪었지만 그는 그때마다 임금의 두터운 신임과 주위 사람들의 믿음으로 복직되어 다시 높은 자리에서 의원생활을 하곤 하였다. 權 (1430~1487)의 『陽村集』에는 楊弘達과 관련된 시가 나온다. 權 의 “灰湯止渴”이라는 詩의 自註에 “내가 楊弘達의 집으로부터 와서, 찰볏짚을 이삭과 뿌리는 잘라내고 그 가운데 부분만 깨끗한 그릇에 태워 재를 만든 뒤, 물에 끓여 가라앉혀 찌꺼기는 버리고 주매, 그것을 마셨다”라는 내용의 문장이 나온다. 이것은 權 과 楊弘達의 친밀한 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그의 인간됨에 대한 일단을 보여주는 자료라 할 것이다.

    세종시기가 되면 御醫로서 황금기를 맞는다. 특히, 치료에 있어서 능력을 인정받게 된다. 좌의정 박은제의 질병과 진평대군의 瘡疹과 이조판서 黃喜의 병환을 치료하여 말, 말안장, 저화, 옷 등을 하사받고, 그의 아들에게까지 3품을 제수받게 된 것이다. 뛰어난 의술로 “가문의 영광”을 이루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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