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獸醫學의 大家로 이름 떨친 儒醫
말을 중요 교통수단으로 삼았던 과거에는 獸醫學이 중요시 되었다. 비록 짐승을 치료하는 獸醫들이 사람을 치료하는 醫員들에 비해서 사회적으로 천대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사회적 필요성 때문에 소홀히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법률을 집대성한 ‘經國大典’에 正三品 衙門인 司僕寺, 從六品 衙門인 典牲署, 司畜署 등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만 보아도 獸醫學은 전 국가적으로 보호 육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정부에서는 典醫監 醫員들에게 여러 차례 獸醫書들을 강독시켜 獸醫關聯 부서에 分屬시키는 조치를 취하는 등 일련의 獸醫學 발전책을 실천하였다. 이에 따라 ‘牛馬方’, ‘新編集成馬醫方’, ‘馬醫書’ 등 獸醫學 관련 서적들이 잇달아 나오게 되었다.
李昌臣은 이러한 獸醫學의 필요성에 부응하고자 노력한 儒醫였다. 그는 1474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후에 홍문관수찬, 교리, 경연시독관 등을 역임할 만큼 학문적 식견이 있는 문신으로 대우받았다. 특히 중국어, 이두문 등에 관한한 당대의 최고라고 자타가 공인하였다.
그는 성종 25년인 1494년에 임금의 명령을 받아 李 , 權五福 등과 함께 ‘安驥集’, ‘水牛經’ 등 중국의 獸醫書를 번역하였다. 이 두 서적은 본래 이전에도 의원을 뽑을 때 시험서적으로 사용된 獸醫書였던 것으로, 이를 번역·보급하여 獸醫學의 학문적 저변을 넓히고자 한 의도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창신은 이와 같은 학문적 능력과 의학자로써의 경륜을 계속 이어가기도 전에, 1504년 갑자사화 때 섬으로 유배되어 썩히게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