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西洋의 新藥에 호기심을 가진 儒醫
朴趾源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知敦寧府事를 지낸 조부 필균 슬하에서 자라다가 16세에 조부가 죽자 결혼, 처숙 이군문에게 수학, 학문 전반을 연구하다가 30세부터 실학자 홍대용과 사귀고 서양의 신학문에 접했다.
1777년(정조 1) 권신 홍국영에 의해 벽파로 몰려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황해도 금천의 燕巖峽으로 이사, 독서에 전심하다 1780년(정조 4) 친족 형인 朴明源을 따라 청나라에 가서 남만주, 북경, 열하 등지를 지나는 동안 특히 이용후생에 도움이 되는 청조의 실제적인 생활 기술을 눈여겨 보고 귀국, 기행문 ‘熱河日記’를 통하여 청의 문화를 소개하고 당시의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비판과 개혁을 논했다.
박지원의 ‘熱河日記’ “金蓼小抄”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吾東의 醫方이 博치 못하고 藥材가 廣치 못하여 거의 모두 中國에 資하였으므로 늘 眞이 아닌 것을 患하였다. 余가 漢北에 있을 때 大理卿 尹嘉銓에게 近世醫書 중에 새로운 經驗方을 살 수가 있겠는가 하였더니, 尹卿의 말에 近世 和國의 刻한 小兒經驗方이 가장 좋은데, 이것이 西南海中荷蘭陀에서 出한 것이다.
또 극히 精하나 많이 效를 보지 못한다. 대개는 四方風氣가 서로 다르고, 古今人稟質이 不同한 까닭이다.……余가 이미 돌아가게 되어 荷蘭陀小兒方과 西洋收露方을 求코자 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다. 우연히 ‘香祖筆記’를 閱하여 그의 錄한 ‘金陵 事’ 및 ‘蓼洲漫錄’을 得하였다. 그 元書 모두가 醫方은 아니나 錄한 바 모두 경험에 의한 것이다. 余는 그 數十을 뽑아 錄하고, 餘外誌記 및 古方雜錄들을 모두 抄錄하여 ‘金蓼小抄’라 이르고자 한다.”(金斗鍾의 『韓國醫學史』에서 재인용)
이상의 기록으로써 荷蘭陀小兒方과 西洋收露方이 우리나라에 직접으로 수입되지 않은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경험적 의방들이 서양에 있다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서양의학에 대한 인식이 더 깊어졌으리라고 추측된다.
이렇듯 그는 중국의학과 서양의학의 새로운 치료의술에 관심을 가지고 중국을 여행하는 기간 동안 신기술을 수집하는 과정에 서양의 經驗醫方에 대한 정보를 접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