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일의 儒醫列傳 5

기사입력 2006.02.17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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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金南一 慶熙大 韓醫大 醫史學敎室



    - 金 永 錫 (1079~1166)

    高麗時代는 귀족이 지배한 시대로 佛敎가 국시인 관계로 儒學의 발전이 더딘 시대로 비쳐질 수도 있다. 그러나 과거제도가 확립된 후에 시험과목 가운데 많은 부분이 유학관련 경전들로 채워져 있어 儒學이 지식인들에게 중요하게 여겨지게 되었다.
    江陵이 본관인 金永錫은 고려 중기에 유학을 중시하는 문벌귀족의 집안에서 태어나 체계적인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그가 당시 최고위직인 문하시중에 앉아 있었던 金仁存의 아들이었던 것을 감안할 때 그는 아마도 당시 최고의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하였을 것이다.

    과거에 급제하면서 첨사부주부를 거쳐 합문지후, 전중내급사가 등의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실력을 인정받았고 1133년에는 낭중으로 金나라에 까지 다녀오게 되었다. 그는 평소에 유학을 공부하는 여가로 의술을 연마하여 백성들의 질병의 치료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 동로병마사를 세 번 역임하고 북로원수를 한번 역임하면서 백성들의 신망이 두터웠던 것은 이러한 그의 의학적 능력과도 관련이 깊다.
    의학에 대해 천시하지 않는 고려시대 사회적 풍조도 의학적 능력을 배양하는 데에 크게 작용되었다. 光宗 때인 958년부터 실시된 醫學科擧制度에는 응시자격으로 品官, 吏屬(품관이 아닌 자로 중앙관직자), 鄕吏, 庶人 등으로 그 자격을 차별하지 않았고, 仁宗 3년인 1125년에는 兩大業은 5品, 醫·卜·地·律·算은 7品까지 허용하였으며 지조와 덕망이 있는 자는 4品까지 응시가 가능하도록 하는 등 의학을 장려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成宗 6년(987년)에는 醫學搏士를 임명하여 12牧에 파견하여 쓸만한 자를 골라 가르치게 하여 의학연구를 활성화시키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김영석은 『濟衆立效方』이라는 醫書를 편찬하여 임상에 힘을 기울였는데, 이 책은 新羅와 宋나라의 醫書들을 참조하여 만든 것이다. 『鄕藥集成方』에 남아 있는 한 개의 조문으로 그 전모를 다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그 내용이 고려의 독자적 내용을 담아내고 있다. 그 내용은 “偏風手足不遂, 疼痛을 치료한다. 松葉 다섯말 정도에다가 소금 두되를 쪄서 뜨겁게 하여 푸댓자루에 담아 다림질해준다. 차가워지면 다시 쪄주어 병이 나을 때까지 한다”이다. 이러한 치료법이 唐代 王燾의 『外臺秘要』에도 비슷한 내용이 보이기는 하지만 『外臺秘要』의 경우에는 內服하는 것으로 되어 있고 『濟衆立效方』에서는 外用하는 것이기에 그 중국적 맥락이 아니라 한국적 맥락에서 치료법을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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