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南一
慶熙大 韓醫大 醫史學敎室
사회개혁과 의학혁명을 동시에 꿈꿔
조선시대 실학자의 대명사로 추앙받고 있는 정약용은 의학자로서 다시 한번 조명해볼 필요가 있는 뛰어난 儒醫이다. 호가 茶山·與猶堂인 그는 본래 어려서부터 부친에게서 經史를 배워 擧子業에 힘쓰다가 1789년(정조 13)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도부승지, 형조 및 병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학문적으로 實事求是를 추구하는 柳馨遠·李瀷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으며 이러한 경향은 암행어사로 활동하면서 관리들의 부패와 백성들의 실상을 목격하게 되면서 더욱 실천적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23세에는 천주학을 공부하여 새로운 세계를 맛보기도 하였지만, 이것이 후에 반대파의 탄핵의 빌미가 되기도 하였다. 천주교에 대한 탄압사건인 신유박해 때에는 경상도 장기로 귀양을 가게 되었고, 급기야 황서영 백서사건으로 18년간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이 귀양살이 기간은 역설적으로 그에게 학문적 성취를 이룰 수 있는 기간이 되었다.
일제시대 말기에 154권 76책으로 간행된 『與猶堂全書』에는 丁若鏞이 이 기간 동안 쓴 저술들이 대부분 수록되어 있는데, 정치·경제·역리·지리·문학·철학·의학·교육학·군사학·자연과학 등 모든 분야가 망라되어 있다.
이 全書 안에 포함되어 있는 『麻科會通』과 『醫零』의 두 의서를 통해 그의 의학사상의 특징을 조망할 수 있다. 『麻科會通』은 이몽수의 『麻疹方』을 중심으로 당시 우리나라에 수입된 많은 중국의 마진전문 의서들을 참고하여 마진의 치료법을 다루고 있는 서적이다. 이곳에는 이몽수의 『麻疹方』, 任瑞鳳의 『壬申方』, 許浚의 『벽역신방』, 趙廷俊의 『及幼方』, 李景華의 『광제비급』등의 조선 의서들이 인용되어 있고, 마지막 부분에는 ‘種痘奇法’이라는 제목으로 제너의 종두법을 기록하고 있다. 유배지에서 백성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저술된 『醫零』은 한의학을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다.
특히, 五行과 運氣에 대한 비판, 近視遠視에 대한 비판 등은 기존 전통의학에 대한 비판으로 의미가 깊다. 그는 천하에서 가장 燥한 것은 火이므로 金은 燥할 수 없고 土 자체는 濕할 수 없고, 또한 熱과 燥는 그 情이 서로 통하는 관계에 있는 것이지 五行에서 말하는 것처럼 ‘火(熱)克金(燥)’의 관계는 성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近視論’에서는 陰氣와 陽氣의 盛衰에 따라 近視와 遠視를 나눈다는 기존 학설들을 비판하여 초점의 거리에 따라 근시와 원시를 갈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어느 정도 서양의학의 이론을 수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가 수용하고 있는 일부 서양의학설로 그를 단순히 서양의학을 수용하여 전통의학을 비판하려고 노력한 의학자로만 평가되어서는 곤란하다 할 것이다.
그는 중국의 의학사상을 조선의 의료현실에 맞게 수용하여 이를 발전시켜나간 한국의학의 맥락하에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의 저술에 보이는 장경악의 의학이론과 서학의 음양오행 비판, 갈렌 생리학의 주체적 수용 등은 그와 같은 맥락에서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徐奉德, 『醫零』으로 본 丁若鏞의 醫學思想, 國際東亞細亞傳統醫學史學術大會 資料集, 한국의사학회 및 한국한의학연구원 공동주최, 2003, 11.19.
慶熙大 韓醫大 醫史學敎室
사회개혁과 의학혁명을 동시에 꿈꿔
조선시대 실학자의 대명사로 추앙받고 있는 정약용은 의학자로서 다시 한번 조명해볼 필요가 있는 뛰어난 儒醫이다. 호가 茶山·與猶堂인 그는 본래 어려서부터 부친에게서 經史를 배워 擧子業에 힘쓰다가 1789년(정조 13)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도부승지, 형조 및 병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학문적으로 實事求是를 추구하는 柳馨遠·李瀷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으며 이러한 경향은 암행어사로 활동하면서 관리들의 부패와 백성들의 실상을 목격하게 되면서 더욱 실천적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23세에는 천주학을 공부하여 새로운 세계를 맛보기도 하였지만, 이것이 후에 반대파의 탄핵의 빌미가 되기도 하였다. 천주교에 대한 탄압사건인 신유박해 때에는 경상도 장기로 귀양을 가게 되었고, 급기야 황서영 백서사건으로 18년간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이 귀양살이 기간은 역설적으로 그에게 학문적 성취를 이룰 수 있는 기간이 되었다.
일제시대 말기에 154권 76책으로 간행된 『與猶堂全書』에는 丁若鏞이 이 기간 동안 쓴 저술들이 대부분 수록되어 있는데, 정치·경제·역리·지리·문학·철학·의학·교육학·군사학·자연과학 등 모든 분야가 망라되어 있다.
이 全書 안에 포함되어 있는 『麻科會通』과 『醫零』의 두 의서를 통해 그의 의학사상의 특징을 조망할 수 있다. 『麻科會通』은 이몽수의 『麻疹方』을 중심으로 당시 우리나라에 수입된 많은 중국의 마진전문 의서들을 참고하여 마진의 치료법을 다루고 있는 서적이다. 이곳에는 이몽수의 『麻疹方』, 任瑞鳳의 『壬申方』, 許浚의 『벽역신방』, 趙廷俊의 『及幼方』, 李景華의 『광제비급』등의 조선 의서들이 인용되어 있고, 마지막 부분에는 ‘種痘奇法’이라는 제목으로 제너의 종두법을 기록하고 있다. 유배지에서 백성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저술된 『醫零』은 한의학을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다.
특히, 五行과 運氣에 대한 비판, 近視遠視에 대한 비판 등은 기존 전통의학에 대한 비판으로 의미가 깊다. 그는 천하에서 가장 燥한 것은 火이므로 金은 燥할 수 없고 土 자체는 濕할 수 없고, 또한 熱과 燥는 그 情이 서로 통하는 관계에 있는 것이지 五行에서 말하는 것처럼 ‘火(熱)克金(燥)’의 관계는 성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近視論’에서는 陰氣와 陽氣의 盛衰에 따라 近視와 遠視를 나눈다는 기존 학설들을 비판하여 초점의 거리에 따라 근시와 원시를 갈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어느 정도 서양의학의 이론을 수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가 수용하고 있는 일부 서양의학설로 그를 단순히 서양의학을 수용하여 전통의학을 비판하려고 노력한 의학자로만 평가되어서는 곤란하다 할 것이다.
그는 중국의 의학사상을 조선의 의료현실에 맞게 수용하여 이를 발전시켜나간 한국의학의 맥락하에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의 저술에 보이는 장경악의 의학이론과 서학의 음양오행 비판, 갈렌 생리학의 주체적 수용 등은 그와 같은 맥락에서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徐奉德, 『醫零』으로 본 丁若鏞의 醫學思想, 國際東亞細亞傳統醫學史學術大會 資料集, 한국의사학회 및 한국한의학연구원 공동주최, 2003, 1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