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 다시보기 - 23

기사입력 2004.10.05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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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법 도구화를 경계한다

    차서메디칼 격팔상생역침의 정확한 구현을 위해선 유주 위에 시침을 해야 한다. 근골격이나 색택 어떤 자연스러운 결등을 참고는 할 수 있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가 않다.

    유주를 확인하는 방법은 눈이나 손의 촉감을 통해서 확인할 수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어렵게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일까? 바로 우리의 눈이 어둡고 우리의 감각이 그런 것과 그렇지 않을 것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무디다는 것이다.

    필자도 유주를 찾으며 굉장히 갑갑해하다가 불연듯 떠오른 직업이 있었다. 바로 심마니였다. 심마니하고 어딘가 비슷한 데가 있는 것 같았다. 분명히 옆에 존재하는 산삼을 못 찾아내는 심마니들과 찾아내는 심마니들….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존재하는 그 유주를 두 눈 시퍼렇게 뜨고도 찾지 못하는 것이 심마니하고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비인부전이라고 했던가? ‘사람이 아니라면 전해지지 않는다’는데, 유주에 있어서는 ‘사람이 아니라면 보이지 않는다’로 바꿀 수 있을 것 같다.

    도대체 유주가 환히 보일 정도의 사람과 도무지 들여다봐도 보지 못하는 눈뜬 장님의 차이는 무엇일까? 아래의 글은 세상만들기 사이트의 우리학문 섹션에 올라와 있는 ‘도구화 그것이 타락이다’라는 글을 압축한 것이다. 아마 여기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지식, 기술이라는 것, 그것이 사람을 위해서 쓰여져야 할 목적적 가치를 상실한 채, 그래서 도구적 가치로 전락한다면 예컨대 지식 기술이 자신의 부와 이름을 높이는 수단으로 되면서 도구화한다면 그때 타락은 시작된다. 인간을 위한 기술 지식이 아니라 인간을 지배하는 수단으로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잠시 수행세계의 이야기를 빌어보자.

    석가모니는 도를 깨치기 위해서 출가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삶의 문제에 대한 처절한 고민에서 출가한 것이라고 말한다.

    공부라는 것이 도를 깨치기 위한 수단인 한에서는 끝내 깨침은 없고 공부는 타락한다는 것, 그 점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차서메디칼의 격팔상생역침을 배우려고 하는 한의사분들이 많이 늘고 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도구화의 유혹은 늘 가까이 있다. 즉 침법이 이름을 얻고 명의가 되려는 수단으로, 하다 못해 병원을 키우는 수단으로, 침법을 한갖 수단적 개념으로 전락시킬 유혹은 항상 같이 한다. 그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면 자기 욕심에 눈이 멀어 공부는 그것으로 끝난다.

    정말 우리들의 눈이 맑고 밝다면 침법의 공부는 날로 새로워질 것이고 정진을 거듭할 것이다. 환자가 사람으로 보이고 경혈과 유주가 보일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보면 볼수록 눈이 어둡고 흐리다는 것, 그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침법의 도구화로부터 의사 자신이 타락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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