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한의학을 치본의학이라고 하고, 양의학을 치표의학이라고 한다.
가령 피부병의 경우, 양의는 피부에서 일어나는 일들만 바라보지만, 한의에서는 각각의 변증에 따라 치료법을 달리 하고 있으며 근본치료를 꾀하게 되는 것이다.
요즘처럼 병원에서도 침을 놓고, 약국에서는 한약을 짓고, 각종 대체의학을 빙자한 유사의료업자들이 한의를 압박해 들어오고 있는 이 시절에, 우리들은 어떤 차별성을 가져야 하는 것일까? 얼마 전 사석에서 들은 모 대학 역사학과 교수님의 이야기가 기억이 난다.
요지는 이랬다. “의사에도 여러 부류가 있는 거 같다. 환자가 오면 돈이 보이는 의사도 있는 것 같고, 아픈 것만 보이는 의사도 있는 것 같고, 사람이 보이는 의사도 있는 것 같다. 모쪼록 사람을 보는 의사가 되길 바란다”라는 말씀이었다. 병증을 보고, 아픈 이들에게 병에 대하여 설명해주고, 처치에 나아가는 모습은 사람의 질병을 대상으로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 업자들이라면 비슷한 양태를 보인다(물론 각각 학문적인 깊이나 기술체계의 차이는 비교자체를 거부한다).
하지만 진실로 질병으로부터의 해방을 고민하는 의원이라면 귀착할 수밖에 없는 본질 적인 문제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사람이라고 하는 병을 일으키는 그 물건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이 바로 한의사를 침구사나 유사의료업자, 그리고 질병밖에 모르는 양의사와 질적으로 구분해 주는, 일도양단하는 차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라고 하는 생명현상은 크게 정신(의식)과 육체(물질)로 대별이 된다. 하지만 동양의학에서는 물질과 의식의 이분법을 넘어서, 그 매개개념인 氣 그리고, 그러한 氣가 파생되는 근본자리, 즉 마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요컨대 사람에 대해서 밝다는 것은 육체와 정신 그리고 그 근원처인 마음에 대해서 밝다는 것이다.
“지금 의사들은 단지 사람의 병만 치료할 줄 알고 마음을 다스릴 줄은 모른다. 이것은 근본을 버리고 끝을 좇는 것이며 원인을 찾지 않고 나타난 증상만을 치료하여 병을 낫게 하려고 하는 것이니 어리석은 일이 아닌가. 비록 일시적인 요행수로 나았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민간의 서투른 의사들의 처치이므로 배울 것이란 없다고 하였다.”(東醫寶鑑의 身形篇 以道療病)
의성 허준 선생께서도 病症은 枝末이며, 마음이 근본이라고 설파하셧다. 즉 마음이 사람이라는 물건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육체와 정신 그리고 마음에 대해서 밝을수 있는 실천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바로 양생에 그 비결이 있다. 이 양생을 차서메디칼에서는 차서라고 하며, 의학입문에서는 음즐 보양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다음부터는 차서ㆍ 양생 이야기를 여러 차원에서 할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