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에 빼앗기고 저평가되고…한의학의 얼굴을 한 ‘고려인삼’
서양 열강에 왜곡된 동아시아 인삼 역사 다룬 ‘인삼의 세계사’ 출간
미국서 열린 ‘인삼 페스티벌’에 호기심 느낀 사학과 교수
7년 걸쳐 국내외 인삼 관련 문헌 모아 집대성
한국에 뿌리 둔 한의학 두고 ‘중의학’ 오해하는 해외 시각 겹쳐 보여
고려인삼 평가 바로잡듯 한의학 가치도 재평가돼야
[한의신문=민보영 기자]
“한국에서 온 좋은 뿌리를 보냅니다. 여기서 이 뿌리는 은과 맞먹는 가치를 지니는데, 너무 귀해서 보통 사람의 손에는 들어오지 못하고 한국과 교류할 수 있는 쓰시마 전주에 의해 무조건 일본 천황에 보내집니다. 이곳에서 이 뿌리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약으로 간주되며 죽은 사람도 살려내기에 충분합니다.”
1617년, 일본 히라도에 주재하던 영국 동인도회사 상관원 리처드 콕스는 런던 본사에 이 같은 통신문과 함께 고려인삼 꾸러미를 보냈다. 고려인삼이 유럽에 상륙한 최초의 공식 기록이다.
고려인삼이 유럽의 ‘대항해시대’에 처음 알려진 후 영국과 미국 등 주요 열강의 관심을 받고, 일제 주도의 약용연구산업에 활용되는 등 고려인삼의 궤적을 그린 ‘인삼의 세계사’가 지난달 17일 간행됐다. 저자인 설혜심 연세대 사학과 교수는 1995년 미국에서 ‘아메리칸 진생 페스티벌’을 보고 궁금증이 생겼다고 한다. 우연히 19세기 영국 소도시 신문 데이터베이스에서 ‘ginseng(인삼), corea(한국)’을 검색했더니 200여 건의 검삭 결과가 나와 연구를 진행하게 됐다. 저자는 인삼을 세계사에서 되살리기 위해 의학 논고부터 약전, 동인도회사 보고서, 경제학 논고, 식물학서, 지리지, 여행기, 박물지, 신문기사, 서신, 사전, 소설, 광고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문헌을 섭렵한다. 한국 인삼 연구는 일제강점기를 제외하면 1950년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됐지만, 90% 이상이 인삼의 약리작용을 분석하는 내용이다. 오늘날 미국과 유럽에서 인삼을 많이 소비하고 있는 이유를 알기 어려운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 책은 인삼이 처음 서양과 조우한 17세기 초부터 18세기까지의 교류를 본초학을 중심으로 개괄한다. 또한 세계상품으로서의 인삼이 동아시아라는 중심부와 유럽, 북아메리카 대륙을 연결하는 핵심 수출 상품이었음을 밝혀낸다. 하지만 18세기 이후 서양이 인삼의 유효성분을 추출해 ‘근대식 약전에’ 편입시키는 데 실패하면서 인삼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고 동양의 낯선 것으로 배척하는 ‘타자화’가 일어난 사실을 지적한다. 인삼의 세계사를 통해 의약학의 성패가 의약적 효능뿐만 아니라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차원에서 좌우된다는 명제를 증명한 셈이다.
◇‘고려인삼’의 자생지 오류가 학명에도 반영되다
인삼이 유럽에 알려지는 과정은 고려삼이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역사와 맞닿아 있다. 마르티니 등 주요 서양 학자들은 19세기에 이르기까지 고려 인삼이 2등 인삼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이런 인식은 지금의 중국 산서성 장치현 지역에 해당하는 ‘상당’의 인삼이 가장 좋다는 ≪본초강목≫의 기록에 영향을 받았다. ≪본초강목≫의 저자인 이시진이 살던 당시에는 상당 지역에서 인삼이 더 이상 산출되지 않았고 그 사실을 이시진도 알고 있었지만, 문헌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서양 학자들은 ≪본초강목≫만을 단독 저작으로 인정하면서 당시의 한국 인삼인 백제삼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 내린 것이다. 1735년 간행돼 지식인들의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던 ≪중국통사≫ 역시 같은 역시 오류를 범하면서 백제삼에 대한 잘못된 사실을 재생산했다.
오늘날 사용되는 고려인삼의 학명을 정한 러시아 학자 칼 안톤 본 메이어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메이어는 843년 세계 식물학회에서 고려삼을 이종명명법에 따라 ‘Panax ginseng C.A. Meyer’ 로 등록하면서, 자생지로 한국 남부와 함께 중국 산서성과 하북성을 언급한다. 북미에서 나는 인삼을 ‘가짜인삼’, 동아시아삼을 ‘진짜인삼’이라고 부르며 두 인삼을 명확하게 구분했지만, 여전히 ≪중국 통사≫의 오류를 답습하고 있었다.
◇열강의 각축장이 된 한반도의 핵심 상품으로 주목
고려인삼에 대한 오류가 바로잡히게 된 건 제국주의 시대에 인삼 재배가 민감한 주제로 떠오르면서부터다. 영국 언론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만주에 관심을 가지면서 “산적의 식민지”와 다름없는 만주가 “금광과 인삼이 충부한 지역”이라는 데 집중했다. 이런 관심은 1886년 전문가로 구성된 영국인의 만주 탐사의 결과물인 ≪백두산 등정기≫ 출간으로 이어졌다.
19세기 후반부터 열강의 각축장으로 한반도과 주목을 받기 시작한 후, 영국은 한반도를 새롭게 ‘발견되고 있는’ 국가로 조명하면서 빠지지 않고 ‘인삼’을 언급했다. ≪중국 통사≫ 등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던 한국산 인삼이 재평가되는 순간이었다. 영국 신문은 한국에서 중요한 교역품인 고려인삼이 “중국에서 매우 귀한 대접을 받는다”고 앞 다퉈 소개했다. 고려인삼에 대한 관심은 일반 인삼과 홍삼을 구별해서 언급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일본이 한반도를 찬탈한 이후 인삼 연구는 거의 일제의 주도로 이뤄졌다. 일본은 강제합병직후 ‘의생규칙’을 제정해 한의사를 의사보다 격이 낮은 ‘의생’으로 격하했지만, 한약을 매우 가치 있는 자원으로 인식하고 전쟁 체재 아래서 한약 자원을 활용하기 위해 큰 관심을 기울였다. 예전부터 조선 인삼을 몰래 반출해 국산화를 시도하던 시도가 합병 이후부터는 노골적으로 드러나서, 농상공부 식산국의 산림과를 통해 한반도 약용식물을 착취하기 시작했다. 극약과 독약의 채취, 아편 제조와 양귀비 밀재배 등으로 축적된 대규모 데이터는 경성제국대학 ‘스기하라교실’의 연구 재료가 됐다.
◇ 국적 사라진 ‘고려인삼’, 네덜란드 소나무숲 밑에서 자라다
해방 후 세계 각지에서 나는 인삼이 객관적인 평가를 받기 시작하면서 고려인삼도 그 가치를 재평가받기 시작한다. 20세기 초에는 인삼 재배자를 위한 다양한 가이드북이 등장하는데, 이 중 교과서처럼 사용됐던 존 쾰러의 ≪인삼과 골든실 재배자 핸드북≫에는 한국삼 인삼을 높이 평가하는 대신 “일본인삼은 특별히 가치가 없다. 그런 것을 중국 시장에 갖고 간다면 교통비나 겨우 빠질까 말까 한 정도다”라는 언급이 나온다. 찰스 루트가 쓴 일반인 대상의 인삼 입문서 ≪인삼이란?≫에서도 중국에서도 최고도 대접받는 인삼이 고려인삼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오랜 수난을 겪어온 고려인삼이지만, 오늘날에도 그에 걸맞은 위상을 지니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2017년 한국농촌경제연구원를 보면 한국 인삼의 홍콩 시장 점유율은 6%에 불과하다. 캐나다산 인심이 72%인 데 비교가 안 될 정도다.
세계 곳곳에서 인삼이 재배되면서 인삼의 국적도 사라지고 있다. 저자는 2015년 미국 최대의 인삼 농장인 워스콘신 위소의 ‘수 인삼회사’에 방문해 고려인삼 반입 경로에 대해 묻게 되는데, 수 대표는 “우리는 중국을 통해 합법적으로 수입한 고려인삼을 재배한다”면서 고려인삼 밭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에서 나는 고려삼이 알려지지 않은 유통 경로로 해외에 수출되면서 국적을 알 수 없는 본초가 된 셈이다. 특히 뉴질랜드는 울창한 소나무 숲에서 고려인삼을 다른 국적의 인삼과 함께 재배하는데, 농수산식품부의 승인으로 인삼이 수출된 사례는 없으니 불법으로 수출되고 있을 것이라는 게 저자의 지적이다.
제국주의 이전에는 중국삼으로 유럽에 알려지고, 이후에는 일제에 의해 주도적으로 개발된 고려삼의 궤적은 한의학의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동의보감, 동의수세보원 등 중국과 독자적으로 한의학 이론을 개척해오던 한의학은 일제에 의해 배척된 이후부터, 그 잔재로 진면목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균형감 있는 시각을 위해 인삼의 사회적 삶의 재평가하듯 한의학의 사회적 가치 역시 역사적으로 재조명해야 하는 이유다.
<목차>
책을 내면서
들어가는 글
1부 인삼, 서양과 만나다
1장 한국인삼의 유럽 상륙
2장 영국 왕립학회와 프랑스 왕립과학원의 인삼 연구
3장 북아메리카 대륙의 인삼 발견
4장 인삼의 분류법과 의학적 활용
2부 인삼의 세계체제
1장 한국-중국-일본의 인삼 정책과 교역
2장 동인도회사의 사무역품
3장 인삼, 미국 최초의 수출품
4장 동아시아 정세와 인삼
3부 위기와 대응
1장 약전에서의 퇴출?
2장 서양 의학계가 바라본 인삼의 효능
3장 약전의 개혁과 유효성분 추출의 어려움
4장 근대 약학 시스템으로의 더딘 진입
5장 야생삼의 고갈과 인공재배의 시작
4부 인삼의 오리엔탈리즘
1장 유비와 배척
2장 불가해한 동양성
3장 동서양의 심마니
4장 심마니의 이미지와 내부 식민주의
맺는 글
참고문헌
찾아보기
<도서 정보>
저자: 설혜심
출판사: 휴머니스트
발행일:2020.02.17
페이지: 464
ISBN : 9791160803235
정가: 25,000원
<저자소개>
연세대 사학과 재직중
교육인적자원부 베스트 티처 상, 연세대학교 최우수 강의상, 최우수 업적 교수상, 최우수 교육자상 수상
《소비의 역사》, 《그랜드 투어》, 《지도 만드는 사람》, 《역사, 어떻게 볼 것인가》, 《온천의 문화사》, 《서양의 관상학, 그 긴 그림자》, 《제국주의와 남성성》간행